美·이란전 이어지자...유럽 에너지 정책 근간 흔들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16일 런던 다우닝가 총리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이스라엘과 이란간 전쟁으로 촉발된 오일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취약 계층에 5300만 파운드 (약 1050억 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6월 말까지 에너지 가격 상한제를 도입해 가구당 평균 117파운드를 절약하도록 하고, 취약계층 난방비를 추가적으로 인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날 기자들의 질문은 앞선 1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호르무즈 해협 해군 파견 문제였지만 스타머 총리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원유)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호르무즈 해협을 다시 열어야 하겠지만 이는 쉽지 않은 문제”라고 했다.
중동 전쟁이 심화되면서 에너지 안보를 둘러싼 유럽의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었던 유럽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에 대비해 산업계 압박과 취약 계층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을 내는 중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재생에너지로의 전면 전환을 목표로 해온 유럽의 에너지 정책을 뿌리부터 돌아봐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대응 여력 위축된 EU, “대러 관계 정상화해야” 주장도
유로뉴스에 따르면 유럽연합(EU)과 이란의 직접 교역량은 대(對) 이란 제재의 영향으로 전체 수입액의 0.03%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EU는 원유 6.2%, LNG 8.7%의 물동량을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고 있어 이번 전쟁의 타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정부 차원의 대응 여력이 2022년 에너지 위기 당시보다 줄었다는 점이다. 지난 10일 학술 연구 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따르면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주요국의 부채 비율이 이미 GDP 대비 100%를 상회하고 있어 대규모 보조금 지급을 위한 추가 차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이 유럽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지만, 당장은 재정 여력 부족으로 심각한 경기 침체 위험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5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올해 유럽의 가스 비축량은 3월말 기준 22~27%에 그쳐 지난 5년 간 평균치인 41%를 크게 밑돌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중단 이후 유럽의 LNG 의존도는 과거 19%에서 올해 45%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측된다.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올 여름에는 작년보다 많은 물량을 비축해야하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마비가 지속될 경우 이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유럽의 가스 가격이 현재 메가와트시(MWh)당 50유로 수준에서 100유로 이상으로 폭등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에너지 문제 타개를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벨기에 바르트 더 베버 총리는 16일 현지 일간지 레코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럽의 이익을 위해 분쟁을 끝내야하고, 저렴한 에너지를 되찾는 것이 상식”이라며 이처럼 주장했다. 인터뷰가 보도된 이후 EU집행위원회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는 이미 법제화된 사안”이라며 즉각 입장을 재확인했으나, 우크라이나 지원을 둘러싼 유럽의 단일 대오에도 실질적인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재정 부담에 ‘보편적 지원’ 선 긋는 英
영국 또한 이번 분쟁의 여파로 천연가스 가격이 60% 폭등하며 전방위적 에너지 위기에 직면했다. 영국 재계에서는 소규모 기업을 중심으로 고정 비용이 40% 이상 급등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정부 지원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16일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2022년 보편적 보조금 지급으로 440억 파운드의 막대한 재정 부담을 졌던 실책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에너지안보 장관은 최근 “유통업체들의 가격 부풀리기 행위를 집중 단속하겠다”며 시장 규제 강화를 예고했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에너지 안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재생에너지 투자 가속화를 통한 ‘에너지 주권’ 확보를 내세우고 있다.
한편 영국 정부 자문위원을 역임했던 디터 헬름 옥스퍼드 대학교 경제정책학과 교수는 지난 9일 영국의 에너지 안보 상황을 진단한 보고서를 내고 균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우리는 가스가 필요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계속 필요한 것”이라며 “가스는 재생에너지 전략에 있어서 필수”라고 했다. 이어 “에너지 정책의 핵심 축은 안보여야 한다”며 “자국을 방어할 수 없다면 친환경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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