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배우 전지현 발에도”…왕실은 저물었지만 꽃신은 남았다 [전원생활 I 장인의 숨결 ]

윤혜준 기자 2026. 3. 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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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화혜장 보유자 황해봉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3월호 기사입니다.

조선 왕실 마지막 화혜장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왕과 왕비가 의례 때 신던 적석과 청석, 스무 가지가 넘는 전통 신을 복원했다. 변화와 변용, 현대화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50여 년 동안 전통의 원형을 지켜온 화혜장 황해봉 이야기다.

“사진을 좀 더 밝게 썼어야지.”

서울 송파구 마천동 화혜전승관에서 황해봉 선생(73)을 만났다. 선생은 15년 동안 품어온 섭섭함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선생은 <전원생활> 2011년 6월호 ‘우리 시대의 명인’ 코너에 소개되었다. 당시 기사 사진 속 신발이 실물보다 어둡게 나온 것이 내내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선생은 자신이 만든 ‘수혜(繡鞋)’ 한 켤레를 직접 가져와 기자에게 보여줬다.

황해봉 국가무형유산 화혜장 보유자가 만든 수혜.

조선시대에는 신분, 성별, 상황에 따라 신는 신발의 종류가 달랐다. 평민은 짚신이나 나막신처럼 값싼 재료로 만든 신을 신었고, 왕족과 사대부는 가죽신을 신었다. 가죽신은 목이 길어 장화와 비슷한 ‘화(靴)’와, 목이 짧아 구두와 비슷한 ‘혜(鞋)’로 크게 나뉜다.

수혜는 ‘혜’의 한 종류로, 왕실과 양반가 여성의 예복용 신이다. 고유한 품격을 지닌 신발 앞에서 선생이 오랜 섭섭함을 꺼낸 이유를 알 듯했다.

“사람들은 고무신이 전통 신인 줄만 알지, 이런 슬기로운 신발이 있다는 걸 잘 모르지.”

선생은 조부인 고(故) 황한갑(국가무형유산 화혜장 보유자)으로부터 전통 신 제작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후 1999년 마흔일곱의 나이에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2004년 국가무형유산 화혜장 보유자가 됐다. 고(故) 육영수 여사, 배우 전지현, LG 창업고문 구평회 등이 그의 신발을 신었다.

5대째 이어진 전통 신의 맥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에는 화장(靴匠) 16명과 혜장(鞋匠) 14명을 중앙 관청에 두어 왕실의 신발 제작을 맡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황해봉 선생의 가문은 고조 때부터 신발을 만들어왔고, 증조부에서 조부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실에 소속된 화혜장으로 전통 신을 제작했다.
황해봉 국가무형유산 화혜장 보유자.

“할아버지는 자랑처럼 이야기하셨어. 고종 황제가 즉위식 때 신은 적석(왕이 정복을 입을 때 신던 가죽신)을 만들었다고. 명성황후 국상 때는 조문객들이 신을 백혜를 만들었는데, 울면서 밤을 새웠다고 해. 피하고 싶었지만, 최고의 장인이라 피할 수 없었던 게지.”

이후에 찾아든 격변의 시대는 화혜장의 운명을 흔든다. 개항 이후 양장이 보편화되며 구두 착용이 늘었고, 1920년대 일본에서 유입된 고무신이 대중화되며 화혜 수요가 급격히 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조선 왕실이 해체되자 관청 소속 장인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결국 근대에 이르러, 조부 황한갑만이 최후의 화혜장으로 남는다.

황해봉 선생은 조부를 존경했지만, 화혜장의 길을 잇고 싶진 않았다. 달라진 시대 속에서 간간이 들어오는 주문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벅찼다. 조부 역시 아들과 손자에게 대를 이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선생의 마음을 바꾼 것은 어느 날 집에서 마주친 한 장면이었다.

“여든여덟 되신 조부가 환갑이 넘은 아버지에게 신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어. 할아버지가 뒤늦게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로 지정되셨거든. 세상 떠나기 전에 중요한 기술만큼은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셨던 거지. 이미 연세가 있으신 아버지가 힘겹게 배우시는 걸 보면서, 내가 더 빨리,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신을 다 만들고 나서 틀을 잡는 도구인 신골의 모습. 조부 대부터 대물림되어온 것이다.

선생은 군 제대 후인 1973년부터 조부에게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는, 한 가지라도 더 익혀두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날마다 조부를 찾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주무시는 조부를 깨워서까지 물었지만, 조부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일흔두 번 공정을 거친 한 켤레
황한갑은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조부로부터 돌잡이 아이들이 신는 아혜(兒鞋)를 만드는 법만 배웠다.

그러나 선생은 임금이 국가 행사에서 면복을 입을 때 신는 적석(赤舃), 왕비와 황후가 적의를 입을 때 신던 청석(靑舃), 문무백관이 신던 목화(木靴) 등 스무 가지가 넘는 전통 신발을 홀로 복원했다.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탄탄한 기본기와 장인정신, 그리고 특유의 집요함 덕분이다.

장식장에 나란히 놓인 전통 신들. 제법 오래돼 보이는 신발은 황해봉의 조부 고(故) 황한갑의 작품이다.

“전통 신은 유물이라 실물을 찾기가 힘들어. 몇 년간 수소문하고 다녔지. 적석은 1970년대 유명 구두 회사 회장이 가지고 있었고, 이방자 여사와 순정효황후가 신은 청석은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더라고. 부탁해서 그걸 보고 직접 복원했지. 신을 만드는 원리는 다 똑같아. 외곽 형태를 보고 모양만 잡으면 돼.”

겸손한 말과 달리, 신발 한 켤레는 일흔두 번의 섬세한 공정과 긴 시간 끝에야 완성된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적석, 청석은 닷새 정도 필요하지. 젊은 시절 조그만 골방에 박혀 혼자 가죽이랑 씨름하던 게 생각나네. 외롭고 고독했어.”

그의 작품을 보면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자수다. 앞서 선생이 기자에게 보여준 비단신 ‘수혜’엔 당초·송죽·국화 무늬가 주로 놓인다. 자수는 자수장에게 의뢰해 수놓는데, 문양은 신는 이의 신분과 성별, 연령에 따라 달라진다.

완성된 자수를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선생의 신발이다. 그의 신발은 특히 코 부분의 곡선미가 뛰어나고, 바느질이 단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화혜는 혼례, 돌잔치 같은 좋은 날에 신는 신발이잖아. 만드는 사람 마음가짐도 자연히 좋아야지. 그런데 나도 사람이라 감정이 변화하곤 해. 집사람이랑 싸울 때도 있어. 그럴 때 작업하면 바느질이 삐뚤빼뚤하게 돼 작품을 망쳐. 기분이 안 좋을 땐 작업도 안 해.”

사람에 자연히 맞춰가는 전통 신발
최근 선생은 바늘로 사용하는 멧돼지 목털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같은 질병 탓에 야생 멧돼지 사냥과 반출이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이 전통을 고수하는 건 멧돼지 목털 바늘이 일반 쇠바늘보다 탄력이 좋아 가죽을 부드럽게 관통하면서도 신의 형태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섬세한 바느질이 가능해서다.
바늘로 사용하는 멧돼지 목털.

“아들이 전국 각지의 멧돼지농장과 사냥꾼들을 수소문했지. 전국 곳곳을 직접 발품 팔아 탄력이 좋고 끝이 갈라지지 않은 최상품의 털을 골라와 줬어.”

이런저런 어려움이 닥칠 때면 선생은 첫째 아들 황덕성 씨의 도움을 받는다. 그는 현재 국가무형유산 화혜장 이수자로,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엔 ‘사흘 동안 신을 만들면 닷새는 쉰다’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인이 일꾼 7~8명을 두고 작업하기도 했다. 그만큼 화혜 제작은 고되다.

아들과 아내의 도움이 있다지만 거의 혼자 해내야 하는 작업이 힘들 법도 하다. 선생은 공정 일부를 기계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전통을 현대식으로 바꾸는 일은 한 번도 고려한 적이 없다고 한다. 고집스럽게 지켜온 전통 신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서양 신과 달리 우리 신은 오른쪽, 왼쪽의 구분이 없어. 사람이 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 맞춰가. 신으면서 발 형태에 따라 모양이 잡히는 것이지. 우리는 이를 ‘발집이 난다’고 표현해. 그래서 슬기롭지.”

황해봉 선생이 만든 남아혜(왼쪽)와 여아혜.

일생의 마지막 신발은 누구에게 신기고 싶으냐고 묻자,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손주며느리에게 신기고 싶어. 그때까지 내가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령 내가 없더라도 우리 아들 손을 거쳐 꼭 한 번은 신게 되겠지.”

[전통신을 만드는 기술 화혜(靴鞋) 이야기]

화혜 제작은 ‘백비’를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신의 형태를 잡아주는 백비는 여러 겹의 천에 풀을 발라 붙여 만든 단단한 속재다. 봄·가을에 광목과 모시에 쌀풀을 바르고 햇볕에 말렸다 이슬을 맞히는 과정을 며칠 반복하면, 흐물하던 천이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백비로 변한다. 이 위에 비단을 대어 신울(신발의 양쪽 가에 댄, 발등까지 올라오는 부분)을 만들고, 소가죽으로 밑창을 준비해 맞바느질로 한 올 한 올 이어 붙인 뒤, 신골을 끼워 두드리고 굽과 앞코를 다듬으면 화혜 한 켤레가 완성된다. 오늘날 ‘꽃신’은 신 전체에 무늬를 수놓은 짧은 비단신, 즉 수혜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윤혜준 기자 I 사진 고승범(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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