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예술인을담다] (27) 70주년 맞은 ‘백치 동인’- 생존 문인 5인 인터뷰
“경상도서건 서울에서건, 그땐 ‘백치’ 하면 모르는 이가 없었어.”
마산의 또 다른 이름, 문향(文鄕). 문학이 태어나고 돌아오는 곳이었던 1950년대 마산에는 특이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사회 통념상 남녀의 경계선이 지엄했음에도 성별 구분 없이 어울려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학교를 마치면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고전 문학책을 읽고 열띤 토론을 나눴고, 방학엔 클래식과 재즈를 들으러 다른 지역 음악감상실로 나들이를 떠나기도 했다. 청춘들은 그렇게 서로 예술의 눈을 띄워주며 시대를 대변하는 문인으로 자라났다. 1956년 결성돼 마산 문단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고등학생들의 문학 모임, ‘백치(白痴) 동인’의 이야기다.

이광석 시인과 이제하 소설가, 박현령 소설가, 송상옥 소설가, 추창영 시인, 강위석 시인, 조병무 시인, 김병총 소설가, 염기용 번역가, 김용복 시인, 김만옥 소설가, 김재호 시인, 황성혁 소설가, 박봉진 수필가, 변재식 연극인, 임혜자 수필가.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이만 헤아리기에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70년 전 마산고등학교와 마산상업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와 성지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서로의 문우가 됐던 동인 ‘백치’. 활동하던 문인들은 저마다의 역사를 남긴 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나둘 하늘의 별이 됐다.
동료들을 떠나보낸 지금, ‘백치’의 옛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는 오직 다섯 사람뿐이다. 이제하 소설가와 강위석 시인, 김용복 시인, 김만옥 소설가와 황성혁 소설가는 백치 동인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동인 결성 70주년을 맞아 이제는 전설이 된, 그들의 봄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백치 동인이 결성하게 된 지도 어느덧 일흔 해가 다 됐네요. 처음 동인 활동을 시작했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이제하 소설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문예반 친구들이 모여서 문학 동인을 만든다기에 그냥 같이하기로 했었죠. 사실 동인 결성 전부터 주변 학교 친구들과 종종 시내에서 시화전도 열고 문학적으로 교류하고 있었어요. 제가 다녔던 마산고뿐만 아니라 마산상고, 성지여고, 마산여고 학생들과 함께 문학을 매개로 함께 놀았었죠. 거기 섞여 있던 사람끼리 매번 모이다가, 이럴 거면 동인을 하나 결성하자 해서 시작된 게 ‘백치’예요.
△강위석 시인= 저는 사실 처음부터 백치 동인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근데 글을 쓰는 친구들이 함께 몰려다닌다고 하길래 같이 놀다 보니까 저절로 그냥 백치 동인이 돼 있더라고요. 저도 학생 때부터 시를 쓰긴 했거든요. 근데 그 친구들은 이미 그 당시에도 우수한 시인이고 소설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소문만 듣고 있다가, 어쩌다 보니 차차 어울리게 돼 자연스럽게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게 된 거죠.
△김용복 시인=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산고에서 교내 백일장을 했었는데, 제가 거기서 차석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백치 동인을 만든 한 학년 위 선배인 전일수라는 형이 저보고 동인에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무조건 가입하라고 해서 그냥 들어갔어요.
△김만옥 소설가= 저는 마산여고를 다닐 적에, 학생이었음에도 교내 도서관을 꾸리고 운영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어요. 매일 책을 분류하고 정리했죠. 책과 도서관이 좋아서 일요일에도 특근하는 사람처럼 학교 도서관에 나갔어요. 제가 항상 도서관에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문학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됐고, 당시 저는 문단에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우연한 인연이 닿아 백치 동인에 합류하게 됐어요.
△황성혁 소설가=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한 첫해, 개천절 기념 교내 백일장이 있었거든요. 제가 써낸 산문이 그때 가작으로 뽑혔어요. 그 뒤 선배들이 자꾸 ‘백치 동인’이란 데 들어오라고 하길래 당시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갔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백치’의 이름을 달고 살아오게 될진 꿈에도 몰랐죠.


-동인 활동을 하며 가장 강렬하게 남은 추억이 있다면요.
△이제하 소설가= 우리가 동인 활동을 할 땐 좋은 선생님들이 정말 많았어요. 당시 마산고 이상철 교장 선생님도 문예를 숭상하는 분이셨고, 김남조 선생님, 이원섭 선생님, 김춘수 선생님과 김세익 선생님을 비롯해 문단의 거목 같은 분들이 백치 동인을 지도해주셨죠. 저 역시 그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많이 받았고, 백치 동인에서 20명 넘는 시인과 작가들이 배출된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싶어요. 훌륭한 선생님들의 밑에서 배웠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강위석 시인= 동인 친구들과 밤바다에 갔던 게 잊히지 않아요. 바다에서 자주 모임을 열곤 했거든요. 특별한 걸 하진 않았어요. 그냥 같이 노래도 부르고 얘기도 하고. 그땐 진짜 다들 아주 가난할 때라 기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죠. 누구 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크게 노래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따라 부르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우정도 쌓고, 이야기도 나누고, 글도 쓰며 서로 자극을 받았던 게 각자의 문학 활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김용복 시인= 동인 친구들이랑 서로 집도 오가며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번은 만났어요. 특히 그때 제하네 집에 책이 참 많았거든요. 우리는 돈이 없어 문학 서적을 전부 다 살 순 없으니까, 문학 전집이 있는 집으로 가서 다 같이 책을 읽었어요. 제하 집을 도서관처럼 들락거린 거죠.
△김만옥 소설가= 그냥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발표회도 하고. 그런 활동들이 너무 좋았어요. 저는 당시에 쓴 작품이 별로 없었는데도, 백치 동인 소속으로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거든요. 또 워낙에 좋은 선생님들께서 와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곤 하니까 제가 특별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황성혁 소설가= 사실 전 가장 막내였기 때문에, 선배들을 모시느라 바빴어요.(웃음) 매달 모여서 글도 쓰고, 별 얘기 아닌 말에도 시시덕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나요. 시화전을 열거나 ‘문학인의 밤’ 같은 행사도 하고요. 뭘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백치 동인은 어떤 의미였나요?
△이제하 소설가= 열정이죠. 문학에 대한 열정, 예술에 대한 열정. 그런 열의가 만들어진 배경엔 항상 백치 동인이 있었어요.
△강위석 시인= 저는 사실 아내를 만난 곳이 백치 동인이에요. 아내뿐만 아니라 인생의 많은 관계들이 백치 동인에서 이어졌죠. 그래서 제게는 이 동인이 ‘두터운 인연’처럼 느껴져요.
△김용복 시인= 제게 백치 동인은 ‘청춘’이에요. 좋았던 시절이고, 제일 보람 있던 시절이고 그래요.
△김만옥 소설가= 저에게 백치는 어깨를 펼 수 있게 해준 존재예요. 백치 동인이 아니었으면 좀 더 초라한 학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인이라는 소속감이 주는 든든함에 늘 자부심이 느껴졌고, 덕분에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어요.
△황성혁 소설가= 백치는 나의 인생을 붙들어주는 존재였다고 생각해요. 인생을 깊이 보게 만들고, 너무 흐트러지지 않게 살도록 붙잡아 준 게 백치 동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훗날 백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라실까요.
△이제하 소설가= 마산은 원래 ‘예향’이라 불리던 도시인데, 지금은 이미지가 많이 흐릿해진 경향이 있어요. 사람들이 으레 마산 문화의 부흥기라고 하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산에 사는 사람들이 문학이나 예술 쪽으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지역에서 문예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백치 동인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활발한 분위기를 다시 끌어 올려 줬으면 싶어요.
△강위석 시인= 우리 백치 동인이 없더라도 마산의 문학적인 풍토는 이어질 거란 생각이 들어요. 마산의 사람들과 마산의 바다만 있다면요. 예술은 환경 속에 이어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백치 동인과 비슷한 문인 활동이 언젠가 또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김용복 시인= 저는 마산이 ‘문향’이라는 인식을 백치 동인이 만들었다고 봐요. 마산 문학사의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자부심이 늘 있었죠. 앞으로도 사람들이 백치 동인이 마산 문학의 기틀을 잡았던 과거의 사실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김만옥 소설가= 큰 바람은 없어요. 저는 그저 사람들이 백치 동인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잊지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에요.
△황성혁 소설가= 인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또 그런 규율들을 잘 포용했던 문학 모임이라고 후대가 생각해 준다면 기쁘겠어요. 우리는 아주 즐거운 모임이었거든요.
장유진 기자 ureal@knnews.co.kr
Copyright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