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의 날(매년 3월 셋째 수요일, 올해 3월 18일)이 제정된 것은 1964년이다. 그런데 경남 서부의 상인들이 스스로 조직을 꾸리고, 규약을 만들고, 건물을 세운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그 흔적이 진주 옥봉동 골목 안에 남아 있다. 골목을 따라 들어서면 낡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묵직한 대문 앞 안내판에 '진주상무사(商務社)'라는 글자가 없었다면 그냥 스쳐 지나쳤을 집이다. 담장 너머 대청마루에는 오래된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남해와 거창을 잇는 길목마다 짐을 지고 다니던 상인들의 이름과 맹세, 그들이 스스로 만든 규약이 그 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 땅의 상인들이 어떻게 뭉쳤고, 홍수에 모든 것을 잃고도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그 긴 이야기를 묵묵히 품고 있다.
옥봉길 골목 안쪽으로 상무사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진주시 옥봉길에 있는 진주상무사.
◇보부상들은 어떻게 조직을 만들었나
진주상무사는 1895년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 서부 17개 고을의 보부상들을 하나로 묶은 조직이었다. 지금 그 흔적은 옥봉동 골목 안 목조기와집 한 채와 대청 벽면에 걸린 현판들로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상인들이 스스로 만든 규약, 대한제국의 상업 정책, 일제강점기의 해체와 재건까지. 이 작은 건물은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지금 여기 서 있다.
전국에서 상무사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은 진주가 독보적이다. 예산·고령·창녕 등 다른 지역에도 보부상 관련 유물이나 조직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독립된 전통 목조기와집 형태로 사옥이 온전히 보존된 사례는 진주상무사가 거의 유일하다.
진주상무사 내부에 걸려 있는 현판들.
상무사 내부에 걸려 있는 현판들.
진주상무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건물의 보존 상태만이 아니다. 건물 안에 소장된 기록물의 가치도 남다르다. 보부상의 명단과 조직 운영 내용을 담은 '사전청금록(師傳靑衿錄)'은 1834년부터 1930년대까지 100여 년에 걸쳐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문서뿐만 아니라 현판·도장·보부상 신분증까지, 남은 자료의 형태도 다양하다. 기록의 깊이와 연속성, 그리고 규모 면에서 이 같은 상무사 기록을 갖춘 곳은 전국에서 진주 뿐이다. 조선 후기 민간 상업 조직의 실체를 한 세기에 걸쳐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한곳에 집적돼 있다는 점에서, 진주상무사는 살아 있는 역사 현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진주상무사 사전청금록, 1884년부터 1938년까지 진주 지역 상인단체(사전)의 역대 임원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상인들의 조직 구성, 운영 방식, 경제 활동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제공=국립진주박물관
상무사의 뿌리는 조선 후기 장시(場市)를 무대로 활동한 보부상에서 찾을 수 있다. 보부상은 보자기에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다니는 봇짐장수(보상)와, 지게에 짐을 얹고 걸어 다니는 등짐장수(부상)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단순한 행상이 아니었다. 여러 고을을 묶은 지역 단위로 조직을 꾸리고, 길 위에서 물건을 팔면서도 규율을 지키고 서로의 권리를 보호했으며, 때로는 국가의 명을 받아 물자를 운반하는 역할도 맡았다.
보부상 조직의 전국 통합은 1883년 조선 정부가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면서 본격화됐다. 이 기관은 1885년 상리국(商理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895년 상무회의소 운영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진주상무사도 공식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됐다. 1899년에는 봇짐장수 조직(우사)과 등짐장수 조직(좌사)이 상무사 아래 하나로 묶이며 체계가 완성됐다.
진주상무사가 관할한 지역은 진주, 곤양, 하동, 남해, 고성, 진남(지금의 통영), 함안, 단성, 산청, 삼가, 함양, 안의, 거창, 합천, 초계, 의령 등 모두 17개 고을이었다. 오늘날 경남 서부 내륙과 남해안 일대에 해당하는 넓은 권역으로, 진주가 이 상권 전체의 중심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보부상 중심의 오일장으로 시작한 진주 중앙시장은 1895년 진주상무사 조직을 통해 경남 서부의 핵심 상권으로 성장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상설시장 규모를 갖추며 근대적 유통망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진주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진주상무사는 19세기 진주를 중심으로 17개 군을 관장하던 경남 경제의 총본산이었다"며 "1884년 우도소 상무사의 설립 시기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인 한성상업회의소와 같은 해로, 대한민국 경제 역사의 시발점으로서 그 의미와 가치는 각별하다"고 말했다. 이어 "순수 민족계 상인들로 구성된 대표 상인 조직으로서, 진주상공회의소의 전신으로 꼽는 데 손색이 없다"고 덧붙였다.
진주 옥봉동 상무사 주변으로 보부상들을 연상케 하는 벽화가 조성돼 있다.
◇홍수로 떠내려가고, 상인들의 손으로 다시 세워져
원래 건물은 1936년 남강이 범람하며 진주 일대를 덮친 대규모 홍수로 쓸려 내려갔다. 이후 진주 지역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모아 1938년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인 1939년 지금의 자리인 옥봉동에 새 건물을 완공했다. 재건 과정에는 훗날 LG그룹을 창업한 구인회 창업주가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주 상계의 젊은 사업가였던 그가 지역 상인들과 함께 의연금 모집에 나섰다는 사실은, 당시 진주상무사가 지역 상업 사회에서 차지하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새 자리를 고를 때 상인들은 저지대를 피했다. 한 번 물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옥봉동의 현재 건물은 주변보다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전통 목조기와집으로,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다. 건물 앞쪽에는 둥근 기둥을 세워 긴 마루 공간을 만들었고, 가운데에는 대청이 있다.
진주상무사는 현재의 경남 서부 17개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보상과 부상의 상업활동을 관장하던 조선후기의 상업기관. 읍내에 위치해 있던 진주상무사는 1936년 대홍수로 1938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건물과 함께 남아 있던 유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진주상공회의소는 이 유물들을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했다. 87건 87점으로 정리된 유물 가운데는 역대 임원들의 이름과 경력을 적은 '사전청금록'을 비롯한 다양한 문서와 인장 등이 포함돼 있다.
진주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도난과 관리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전청금록' 등 소중한 자료들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상무사의 역사를 후세에 온전히 전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며 "전문기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 영구 위탁함으로써 보존은 물론 전시와 학술 연구에 적극 활용되길 바랐다"고 밝혔다.
상무회 경상남도지부 도장, 진주상무사는 1920년대 상무회 경남도지부(또는 진주지부) 등으로 불리며 상업 활동을 주도했다. 제공=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기증 유물을 정리한 뒤 2016년 특별전 '진주상무사 - 진주 상인 100년의 기록'을 열고 도록도 발간했다. 이효종 학예연구사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진주 지역 상업사를 일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며 "기증 당시 유물 상태가 좋지 않아 박물관이 직접 예산을 들여 보존 처리를 진행했고, 원문 번역까지 마친 뒤 대중에 공개했다"고 말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지난 2018년 기증받은 자료들을 일반 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류하고 번역 정리해 '진주상무사-보부상에서 근대 시장상인으로'를 펴내기도 했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펴낸 '진주상무사-보부상에서 근대 시장상인으로' 표지.
진주상무사는 1980년대까지 진주중앙시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제사를 지낼 때는 '진주상무사지령(晉州商務社之靈)'이라 쓰인 위패를 사용했다. 이후 참여 상인들이 노령화되면서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 학예연구사는 "1936년 홍수 이전 상무사가 있던 원래 자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면서 "그 자리를 찾아 기념하는 것도 지금의 건물을 보존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건물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
진주상무사 대문 근처에는 경남도 문화유산 자료 안내판이 서 있다. 그런데 안내판을 읽고 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이내 걸음이 멈춰진다. 문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잠긴 것이 아니다. 건물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담벼락 너머로 빨랫줄이 보이고, 누군가의 일상 흔적이 널려 있다.
경남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된 건물에 거주자가 있다는 사실은 낯선 풍경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 만큼 외부에 개방하거나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도 자연스레 한계가 따른다. 대청 벽면에 걸린 현판들도, 보부상들의 이름과 맹세가 새겨진 기록들도, 굳게 닫힌 문 안쪽에 잠겨 있다. 관계 기관이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광복 이후 진주 상인 조직이 '진주상무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그 시절의 뿌리가 결코 얕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건물은 2011년 6월 경남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됐다.
옥봉동 상무사 뒤편에서 만날 수 있는 보부상 벽화.
진주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충남 예산의 내포보부상촌처럼 상무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사례는 충분히 벤치마킹할 만한 모델"이라며 "K-기업가 정신과 연계해 이 유산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정신적 토대로 계승·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진주상무사가 관할했던 17개 고을은 오늘날의 서부경남과 거의 겹친다. 하동, 남해, 산청, 의령, 함양 등은 현재 인구 소멸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돼 있고, 나머지 지역들도 해마다 인구가 줄고 있다.
인구가 줄고 지역이 쪼그라드는 지방소멸의 시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상업이 번창하던 시절을 살아남은 진주상무사가 옥봉동 골목 안에서 조용히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 경제가 다시 활기를 찾는데 필요한 것은 외부의 지원이나 행정의 힘만이 아닐지 모른다. 130년 전 이 땅의 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생을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각자도생이 아닌 연대와 외부 의존이 아닌 자생력, 진주상무사는 지금 서부경남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두 가지를 이미 몸소 실천했던 조직이다. 나라가 위태로운 시절, 생업의 네트워크를 이어온 상인들의 발자취가 지금도 옥봉동 골목 안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