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게임의 노예가 구청장님께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한겨레 2026. 3. 18. 19:1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같은 도시를 걷지만 서로 다르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왼쪽사진)와 걷기 게임 ‘피크민 블룸’. 엔케이컨텐츠 제공, ‘피크민 블룸’ 화면 갈무리

이명석 | 문화비평가

토요일 아침 댓바람에 허겁지겁 운동화를 신고 뛰어나갔다. 별다른 약속도 없었다. 중고 앱에서 근사한 물건을 찜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어깨띠를 맨 사람이 다가왔다. “운동 열심히 하시네요. 구청장 예비후보 아무개입니다.” 건네는 명함을 낚아채곤 달렸다. 운동이라고요? 그 비슷한 것이긴 하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꽃이랍니다. 전철역에 방금 피어난 파란 프리지어요.

한달 전쯤 보건소에 대사증후군 검진을 받으러 갔다. 위험 경계선 주변의 숫자들을 보는데 ‘그 질문’이 나왔다. “평소 운동은 어떻게?” 나는 침을 삼키며 준비해둔 핑계를 떠올렸다. ‘허리를 삐끗해서….’ 그런데 상담원이 대신 답해줬다. “겨울이라 움직이기 힘드시죠? 그러실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의 경우엔….”

뭐랄까? 야단은 쳐야 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해치면 절대 안 된다는 태도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이 게으름뱅이를 어르고 달래 근육을 지키고 혈당을 떨어뜨려 죽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허리가 나을 때까진 걷는 위주로 해보려고요.” “그냥은 운동이 안 되고요. 숨이 찰 때까지는 걸으셔야 해요.”

이러기를 6개월 단위로 벌써 세번째다. 걸으면 돈을 주는 앱도 써보고, 서울시에서 주는 건강 시계로 챌린지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르르. 출근이 필요 없는 직업이니 집안에만 며칠씩 머무르기도 한다. 외부 일정이 생기면 가장 덜 걷는 동선을 만들곤 기특해한다. 항상 신호등을 주시하며 횡단보도에서 숨찬 순간을 만들지 않으려 애쓴다.

이런 내가 하루 평균 만보에 육박하는 몇주를 보내고 있다. 어쩌다 빠져든 ‘걸으면서 꽃 심는 게임’ 때문이다. 걸음 수에 따라 돈을 주는 앱을 서너개 굴려 커피값을 해결하는 친구가 의아해한다. “참 별일이네. 그 게임은 돈을 낼 수도 있는데.” 그러게 말이다. 나는 게임과 현실을 오가며 모종을 키우고 꽃을 심고 먼 길을 다녀온다. 다리가 단단해지고 소화가 잘되고 잠이 잘 온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게임 소식을 들었다. 지구상에 인간이 한줌밖에 남지 않았는데, 게이머가 에이아이(AI) 로봇 역할을 맡아 인간에게 요리를 먹이고 행복하게 만들어 멸종을 막아야 한다. 거기에 빗대자면 비리비리한 나를 살리려고 보건소 직원과 걷기 게임이 경쟁하는 셈이다.

한동안 서울시의 ‘손목닥터9988’을 썼다. 걷기가 기본이지만 식단 올리기, 건강 퀴즈 등으로 푼돈을 얻었는데, 이젠 하루 8천보 외에는 해볼 만한 과제가 없어졌다. 예산 문제겠지? 그런데 한강버스 선착장을 방문하면 포인트를 지급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의도가 너무 뻔하잖아.

작년엔 365 서울챌린지를 열심히 했다. 서울 곳곳을 다니며 과제 빙고판을 완성하면 보상을 해준다. 보라매공원의 정원박람회를 가고, 몰랐던 숲속도서관을 찾고, 여러 둘레길을 걸었다. 이쪽이 훨씬 재미있고 동기 부여가 되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시들해져 빙고판을 접었다.

걷기 게임은 이 둘을 합친 것과 닮았다. 많이 걸으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그런데 보상이 다르다. 첫째, 귀여움. “만보 축하해요!” 모든 걷기 앱이 응원하지만, 예쁜 캐릭터가 꽃을 뿌리니 더욱 힘이 난다. 둘째 수집욕. 모종, 기념엽서, 배지를 늘려가는 재미다. 셋째, 우정. 친구는 물론 주변의 여행자들과 함께 산책하며 꽃이 만발한 세상을 만든다.

다른 게임과의 차이라면 진짜 세상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뜻밖의 즐거움과 어려움이 겹쳐진다. 동네의 숨겨진 역사적 유적을 찾아 기뻤지만, 쓰레기투성이에 배달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흉측한 골목을 지나야 했다. 미군 기지 근처를 지나는데 네트워크 오류가 일어나 심던 꽃을 통째로 날렸다. 희귀한 꽃을 찾아 달려가니 외부인 출입이 통제된 아파트 단지 안이었다.

아침에 만난 구청장 예비후보의 명함을 꺼내본다. 뉴욕에서 무안까지, 걷기 좋은 도시(walkable city)를 만들자는 움직임은 알고 계시죠? 복잡하지만 걷기 좋은 도시에 살면 치매 가능성이 낮다는, 시드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셨나요? 새 구청장이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 주길 바라며, 나는 구청 1인가구지원센터의 ‘구근 심고 가꾸기’를 신청했다. 걷다가 지친 누군가 내 창밖의 꽃을 보며 힘을 내길 바란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