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도는 공조판서..왕사남 실록 기록도 흥미진진[함영훈의 멋·맛·쉼]

함영훈 2026. 3. 1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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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민 “80% 진실”, 사학계 “픽션 우세”
‘기록만 맹신하는’ 편협한 사학방법론 주의
장릉옆 물무리습지 입구에 세워진 엄흥도의 동상. 조선왕실 피에타상이다.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이번주 중 1400만 관객 돌파가 확실시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의 픽션과 논픽션의 비율은 4대6쯤 되는 것 같다. 연산군 시절의 풍경 한조각을 그린 영화 ‘왕의남자’는 이 비율이 8대2쯤 된다.

왕실, 당상관 또는 사대부 이상 아니면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픽션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인데, 향토사학자, 현지주민들의 탐문고증결과까지 존중한다면 사실에 가까운 논픽션 비율은 높아질 것이다.

실록과 사료를 연구하는 사학과 교수와 연구자들은 이번 ‘왕사남’ 영화의 픽션 비율이 논픽션 부분 보다 높다고 주장하지만, 영월군민과 강원도향토사학자들은 사실에 근접한 묘사가 80% 정도 되는 것으로 본다. 단종대왕과 함께 사는 남자 엄흥도가 익살스런 성격이라는 점만 픽션적 요소가 강하고, 나머지는 사실에 가깝다고 군민들을 보고 있다.

왕사남 영화 한장면

자기가 괜찮다고 믿는 서책과 기록 외에는 좀 처럼 인정하려들지 않는 사학자들은 개연성, 심증 같은 것을 무시한다지만, 정작 자신의 연구 과정에서는 믿는 것에 한해 개연성과 심증을 논문에 투영하고 마는, 자가당착을 보인다. 사실 기록에만 의존하는 것은 분서갱유하고 자기왕조를 새로 써내려간 자에게 역사가 유리하게 해석될 소지가 크므로 오히려 실체적 진실을 고증하려는 연구자의 자세가 아니다. 기록외에 지리,지형,천문과 연관성 있는 구전내용, 분서갱유 이후 잘못기록되거나 고의적으로 왜곡된 기록의 폐기 등을 수반되어야 남은기록만 보는 편협한 역사연구에서 벗어날수 있다. 무엇보다 사대주의와 친일식민주의가 은연중에 몸에 뱄을 경우 당장 역사연구를 그만두어야 맞다.

1457년 영월 단종 살해사건의 경우, 사학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천만리 머나먼길 고운님 여의옵고..”의 작가로 왕방연(王邦衍)을 꼽은 점이다. 당시 부터 지금 까지, 영월군민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시는 억울한 군주의 피살에 대한 백성의 여론을 집약시킨 것일 뿐, 작가가 따로 없다는 것을.

국문학사학자들은 왕방연이 적혀 있길래 이를 지은이로 단정하며 아이들이 보는 교과서를 만들었다. 가짜뉴스에 놀아나기 딱좋은 편협한 팩트 인정 과정이다.

알고보면 고려의 주류세력인 왕씨는 우리나라 고유의 성이지만, 이성계-이방원 일파, 그 후 수양대군에 이르는 연쇄 쿠데타 성공세력들이 고려 지우기를 300년간 대대적으로 벌였기에, 조선초중기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왕씨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평민도 개죽음을 당하는 때였다. 특히 전직 군주에 대한 사법처리를 담당하는 금부의 간부급은 왕씨 성으론 더더욱 될 수 없었다. 왕방연은 ‘일국의 왕이 (영월) 강물에 흐르다’라는 뜻의 시 제목이다. 구데타세력이 일국의 왕을 무도하게 살해한 행위를 고발하는 민중적 시의 헤드라인이다.

청령포

여전히 발췌번역 만 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이 하루속히 완역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실록은 엄흥도에 대해 아전급(중인, 지방관의 참모)이었다가 공조판서로 추서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고전번역원이 전한 ‘왕사남’ 실록 기록.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 사신(史臣)이 또 말하기를 “신상이 돌아와 복명하고,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노산군의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옆에 있다.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는데, 다른 무덤이 그 곁에 여럿 모여 있다. 고을 사람들이 ‘임금님 묘[君王墓]’라 부르고,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초 노산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온 고을이 두려워하면서 허둥대었는데, 고을의 아전인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그 일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11년(1516) 12월 10일 기사>

엄흥도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단종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지 60년이 지난 시점이다. 단종의 복권(復權)에 대한 논의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로 금기시되다가 중종 때에 이르러 사림파(士林派)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종은 우승지 신상을 영월로 파견하여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묘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신상이 돌아와 노산군 묘소의 실태를 보고하고, 아울러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냈다는 영월 백성들의 증언을 전해주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엄흥도의 절의를 특별히 기록하였던 것이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기리는 창절사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노산군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아무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고을의 아전 엄흥도란 자가 즉시 가서 곡림하고 스스로 관곽을 준비하여 거두어 묻었으니, 지금의 이른바 노묘(魯墓)입니다. 엄흥도의 절의는 사람들이 지금도 칭찬하고 있기에, 신이 전조(銓曹)를 맡고 있을 때 그 자손들을 녹용(국록을 주고 채용함)하고자 했으나, 그 유무를 알지 못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자손이 본 고을에도 있고 괴산(槐山)에도 있다고 하니, 그 절의를 장려하는 도리로 볼 때 녹용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찾아 녹용하게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0년(1669) 1월 5일 기사>

최석정(崔錫鼎)이 또 아뢰기를 “단종 대왕이 승하하시던 처음에 본군의 호장(戶長) 엄흥도가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육신(六臣)의 사당에 배향(配享)하게 된 것입니다. 향리(鄕吏)는 이미 천인(賤人)이 아니며 충절 또한 가상하니, 전에 없던 성대한 전례(典禮)를 추거(追擧)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포증(褒贈)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손이 없다고 하니 만약 낭관(郞官)의 직위에 특별히 포증을 더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나도 또한 들었다.”라고 하고는 이에 해조에 명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숙종실록 24년(1698) 12월 16일 기사>

1698년(숙종24) 11월에 이르러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마침내 복위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24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일에 앞서 1691년에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먼저 이루어졌고, 그들을 모신 사당에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이 하사되었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에 엄흥도가 배향되었다는 실록의 기록은 숙종 때부터 일찌감치 그의 절의가 사육신에 버금갈 정도로 높게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에 이르러 재상인 최석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엄흥도에게 좌랑(佐郞)이라는 관직이 추증되었다.

보통왕릉은 일직선 배열인데, 장릉은 정자각 가는 길과 능으로 가는 길이 수직이다.

영조 때에 이르러서는 엄흥도에 대한 포장이 더욱 융숭해졌다. 1728년(영조4)에는 엄흥도에게 자손이 없어 외손이 봉사(奉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어려울 정도로 빈한하다는 여필용(呂必容)의 보고를 받은 영조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분묘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1739년에는 영남에 사는 후손을 녹용하자는 박사정(朴師正)의 건의를 허락하였으며, 1743년에는 이주진(李周鎭)의 건의에 따라 기존에 추증한 벼슬을 더 높여 참의(參議)를 증직하였다. 1758년에는 사육신을 제향하는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에 엄흥도를 배향한다는 보고를 들은 영조는 사육신과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는 한편, 참판(參判)으로 올려 증직하고 자손을 녹용하라는 명을 다시 내렸다.

정조 6년인 1782년에는 생육신(生六臣)인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 등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때 정술조(鄭述祚)가 상소를 올려 “엄흥도의 우뚝하고 큰 충절을 논한다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들과 백중(伯仲)이 된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네 신하에게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때를 맞아 엄흥도만 누락된다면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만일 네 사람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은전을 받게 된다면 성조(聖朝)에서 표장하는 도리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라고 하여 엄흥도에게도 시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을 받지는 못하였다.

단종이 살해된 관풍헌

전교하기를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뿐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15년(1791) 2월 21일 기사>

1791년(정조15)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순절한 신하를 기리기 위해 제단을 설치한 것이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 사육신, 엄흥도 등 32인은 정단(正壇)에 배향되고, 사적(事蹟)이 불분명하거나 연좌되어 죽은 198인은 별단(別壇)에 배향되었다. 정단에는 관직에 있다가 순절한 사람 31인만을 배식(配食)하는 것으로 처음에 의견이 모아졌으나, 엄흥도의 절의를 높게 평가했던 정조는 특별히 정단에 배식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고종 때인 1876년에는 마침내 공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렸다. 엄흥도가 행한 의로운 행동을 시법(諡法)에 따라 평가하여, “목숨을 걸고 윗사람을 섬겼다.[危身奉上]”는 의미의 “충(忠)”과 “굳세고 능히 결단하였다.[强而能斷]”는 의미의 “의(毅)”를 합쳐 만든 시호였다. 1900년에는 경상북도에 사는 후손 엄주호(嚴柱鎬)가 상언(上言)하여 엄흥도에게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은전[不祧之典]을 청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 상언에는 단종과 엄흥도가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단종 대왕께서 손위하신 이듬해인 병자년(1456)에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옮겨 갔을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습니다. 단종께서 근심에 싸여서 홀로 앉아 <자규(子規)> 시를 읊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때에, 홀연 사육신이 꿈에 나타나서 억울한 사정을 하소하였는데 마치 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단종께서 꿈에서 깨어 울면서 매우 슬퍼하고 있을 때에 마침 엄흥도가 산마루에 올라 그곳을 바라보고 “청령포에 등불이 환하고 또 무슨 울음소리가 나는구나. 가봐야겠다.”라고 하고는 옷을 벗고 강을 건너 곧바로 그 앞에 나아가 엎드려서 인기척을 내었습니다. 단종께서 울음을 그치고 “너는 누구이며 깊은 밤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물으시자, 엄흥도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군의 호장인데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서 감히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하였습니다. 단종께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여기에 와서 머무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하셨습니다. 엄흥도가 그날 이후로 밤마다 찾아가서 뵈었다고 합니다. 정축년(1457) 10월에 단종께서 승하하시자 고을 수령과 종자(從子)들은 두려워서 감히 거두어 염도 하지 못하였는데, 엄흥도는 곧바로 소리내어 울면서 관과 이불을 마련하고 몸소 염을 하여 등에 지고 갔으며, 선산 안의 산기슭에다 손수 묻었으니, 이곳이 오늘날의 장릉입니다. <고종실록 37년(1900) 5월 11일 기사>

사방이 산과 물로 둘러싸인 궁벽한 산골로 유배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가 된 어린 임금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엄흥도의 방문과 보살핌은 단종에게 분명히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엄흥도는 일개 아전의 신분으로 남들이 두려워서 물러날 때 “선을 행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진실로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다.[爲善被禍, 誠甘樂之.]”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다. 그의 절의가 알려진 뒤로는 사육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추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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