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명화산책] 노동의 경건함 담은 밀레의 ‘만종’

강현철 2026. 3. 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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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논설실장


예전 이발소들이 많았던 시절, 머리를 깎으러 가면 꼭 보는 그림이 있었다. 바로 밀레의 ‘만종’이다. 밀레의 그림은 ‘이발소 그림’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노동과 신앙의 경건함을 묘사한 것이 우리 정서와도 잘 맞았기 때문이다.

황혼녘 들판, 두 농부가 하루의 고된 노동의 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만종 기도(Angelus)를 올리고 있다. 여성은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남성은 모자를 벗어들고 고개를 숙이며 서 있다. 발 밑에는 감자 바구니, 주변에는 수레와 쇠스랑이 놓여 있다. 오른쪽 뒤편 멀리 지평선 아스라이 작은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장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1859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55.5× 가로 66cm.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晩鐘·프랑스어 L‘Angelus, 영어 The Angelus)이다. 저녁종이라는 뜻인데 원제목인 L’ Angelus는 삼종 기도를 뜻한다. 삼종(三鐘) 기도는 가톨릭에서 하루 세번 일과를 잠시 멈추고 드리는 기도로, ‘삼’은 세번 종을 치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세번 치는 식의 타종을 의미한다. 프랑스 파리 인근 작은 농촌 마을인 바르비종에서 감자를 수확 중인 두 농부가 하루를 끝내고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신 신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해선 부부, 일터 동료, 농부와 하녀 등 해석이 다양하다.

밀레는 “‘만종’의 아이디어는 어릴 적 기억에서 나왔다. 할머니는 들판에서 일하시다가도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일을 멈추고, 가엾는 죽은 이들을 위해 삼종 기도를 드리게 하셨다”라고 했다. 밀레는 미국의 화가이자 수집가인 토마스 골드 애플턴의 의뢰로 이 작품을 그렸으나 애플턴이 그림을 가져가지 않자, 그림에 교회 첨탑을 추가하고 원래 제목이었던 ‘감자 수확을 위한 기도’(Prayer for the Potato Crop)를 ‘만종’으로 바꿨다. 종교적 헌신과 엄숙함, 거룩함 등의 분위기를 담고 있은 이 작품은 19세기 당시에도 프랑스 전역의 가정에서 복제본을 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국내 유명 화가 박수근도 ‘만종’을 보고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특히 ‘만종’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에 밀레의 그림에서 파생된 이미지를 포함시켰을 뿐 아니라, ‘만종’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담아 ‘밀레의 만종에 대한 비극적 신화’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달리는 그림에 담긴 경건한 분위기가 사실은 슬픔에 가까우며, 그림 속 두 농부는 감자 바구니가 아닌 아이의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해석에 따라 달리는 루브르 박물관에 ‘만종’의 X선 촬영을 요청했고, 실제로 박물관은 이를 시행했다. X선 사진에는 인물들의 발치에 길쭉한 기하학적 형태가 나타났으며, 달리는 이것이 감자 바구니가 아닌 아기의 관(棺)이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공주형씨는 “‘만종’의 부부는 주어진 생의 조건을 피곤한 일상이 아닌 경건한 감사로 승화시킨다”며 “신의 축복 아래 이 세상 삼라만상이 서로에 대한 불신을 씻고 화해하는 듯한 이 그림에서 버거운 삶도 감당할 만한 것으로 무게를 덜어낸다”고 했다.

밀레, ‘이삭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8 x 111.8 cm.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등의 작품으로도 이름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 1814~1875년)는 ‘농민 화가’로 불린다. 가난한 농민의 고단한 일상을 우수에 찬 분위기와 서사적 장엄함을 담아 그린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로, 동시대를 살았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와 비교된다.

프랑스의 수도권인 일드프랑스 지역의 작은 마을로, 퐁텐블로 숲으로도 유명한 바르비종에서 살아 바르비종 화파의 선구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바르비종 화파는 풍경화가 주였는데 때때로 농장 노동자와 마을 생활을 담은 풍속화를 그리기도 했다. 빛을 담은 색채, 자유로운 붓질 및 부드러운 형태 표현 등이 특징이다.

밀레는 회화뿐 아니라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는데, 19세기 후반 전통주의로부터 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밀레는 1814년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지방 작은 농촌마을 그레빌 아그의 가톨릭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농사로 바쁜 어머니 대신 신앙심 깊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으며, 가족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종교와 농사라는 이 두 가지 경험은 후일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 키워드다.

밀레의 아버지는 미술에 대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19세 때 근교 쉘부르에서 활동하던 초상화가인 뒤무셸에게 보내 그림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2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8남매 중 장남이었던 밀레는 그림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권했고, 이듬해 국립미술학교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1839년, 학교를 그만둔 후 그는 쉘부르로 돌아와 약 2년간 초상화를 그려 생활을 했다. 1841년 폴린 비르지니 오노와 결혼한 후 파리로 올라와 풍속화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내 오노의 결핵이 심각해지면서 밀레는 약값을 벌기 위해 누드화까지 손댔다. 하지만 결혼한지 3년만에 아내는 세상을 떴으며, 밀레는 한동안 붓을 꺾는다.

1845년 밀레는 셸부르의 카페 여급이던 카트린 르메르를 만난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밀레는 가족과 인연을 끊고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했지만, 9명의 자녀를 낳으며 평생을 함께 했다.

농민 생활을 소재로 삼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바르비종 풍경화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1848년경이다. 1844년 농가 생활을 다룬 최초의 작품 ‘우유 짜는 여인’을 선보인 이후 ‘키질하는 사람’(1848년), ‘씨 뿌리는 사람’(1850), ‘건초 묶는 사람들’(1850) 등으로 ‘농민 화가’로서의 위상을 쌓아갔다.

밀레, ‘키질하는 사람’(The Winnower). 1847~1848년. 캔버스에 유채. 100.5 x 71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바르비종으로 이사 직전인 1848년 살롱전에 출품한 ‘키질하는 사람’은 ‘농부의 화가’라는 출발을 알린 작품이다. 밀레는 신화나 종교 속의 장면을 상상해 그리지 않았다. 대신 현실에서 만나는 일하는 농부를 주인공으로 택했다. ‘키질하는 사람’에는 곡식 검불을 날려보내는 일을 하는 한 명의 농부가 보인다. 인물의 얼굴은 흐릿하며, 배경도 불투명하다. 오로지 키질이라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농부의 노동이 주제인데, 이 노동의 이미지를 장엄함으로 각인시키는 게 밀레 그림의 힘이다.

밀레, ‘씨 뿌리는 사람’ ( Le Semeur‘ ·The Sower). 1850년. 캔버스에 유채. 101.6 × 82.6cm.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수차례 낙선 후 살롱전에 입선한 ‘씨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는 농부를 통해 노동의 고단함을 암시하는 한편, 대지와 투쟁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숭고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노르망디를 배경으로 햇빛에 검게 그을린 농부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인상적이다. 훗날 빈센트 반 고흐가 이를 모사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밀레는 적지 않은 구설수에 올라야 했다. 당시에는 생소한 농민들의 노동을 그림의 주제로 삼은 까닭에 사회주의자 아니냐는 비난이 거셌던 것이다. 그러나 밀레는 개의치 않았다. “설사 나를 사회주의자로 여긴다 해도 인간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자극하는 것이다”라며 노동의 존귀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추수가 끝난 들녁 세 명의 가난한 여성 농민이 힘들게 허리 굽혀 이삭을 줍는 장면을 그린 1857년작 ‘이삭 줍는 여인들’은 서사적 자연주의의 정수라는 평가를 듣는 작품이다. 여인들의 뒷편 멀리에는 추수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황금빛 햇살에 물든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엄숙하고 장엄하다. 곤궁했던 밀레는 구약성서 룻기에 나오는 장면을 표현한 이 그림 이후 비로소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밀레는 들판 아닌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농부들의 복장과 체격이 엇비슷한 건 이 때문이다. 머리속으로 생각한 ‘농부의 전형’을 ‘장르화’(Genre Painting)와 ‘풍속화’로 분류할 수 있는 그림속에서 창조한 셈이다.

이후 밀레는 ‘양털 깎는 여인’, ‘괭이를 든 사람’, ‘감자를 심는 사람들’, ‘낮잠’ 등을 내놓았다. ‘낮잠’은 파스텔화로 고흐가 수없이 모사해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리고 1864년 마침내 ‘송아지의 탄생’으로 살롱전 대상을 수상했으며, 1869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농사와 궁핍에 시달려 쇠약해진 밀레는 이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1875년 바르비종에서 죽음을 맡게 된다. 그의 유해는 평생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바르비종 화파의 화가 테오도르 루소의 곁에 묻혔다.

고흐,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 1888년년. 캔버스에 유채. 64.2 x 80.3 cm.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투박함과 단순함,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노동의 엄숙함은 밀레의 작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밀레는 특히 후기 인상주의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고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밀레를 존경한 고흐는 그를 ‘아버지 밀레’라고까지 했다. 고흐의 ‘첫 발자국’, ‘낮잠’, ‘씨 뿌리는 사람’ 등은 밀레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밀레에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된 노동에도 불구, 힘들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신성한 노동에서 풍겨나오는 엄숙함과 장엄함이 느껴진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밀레는 “일생을 통해 전원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가 본 것을 솔직하게, 그리고 되도록 능숙하게 표현하려 할 뿐”이라고 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서양 미술사상 밀레만큼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화해시킨 작가는 없다. 그는 종교와 휴머니즘, 그 골 깊은 적대의식 사이의 진한 화해를 유도하고 있다”며 “본격화된 산업화시대의 환경 파괴에도 불구하고 땅과 함께 노동하는 인간상으로 자연과 인간 간의 화해 또한 이끌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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