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극장의 시간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6. 3. 1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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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의미를 유추하게 만드는 세 편의 단편
이종필·윤가은·장건재 감독이 조명한 영화의 의미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침팬지》 ⓒ티캐스트

당신에게 극장은 어떤 공간으로 남아있나. 이제 막 호감을 나눈 연인에게 극장은 나란히 붙어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설렘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상상의 세계로 접속하는 꿈의 공간이었을 것이며, 누군가에겐 일상의 무게를 벗어던지는 휴식처였을 것이다. 극장은 만남의 장소로, 재회의 공간으로도 참 오랜 시간 대중 곁에 있었다.

그런 극장이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휘청이더니, OTT라는 신흥 강자를 만나 그야말로 극심한 보릿고개를 겪고 있다. 그사이 대한극장,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 메가박스 성수, 명필름아트센터 같은 씨네필들의 단골 장소들이 문을 닫았다. 투자 경색이나 제작 편수 급감이라는 말도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이젠 고루하게 느껴진다. 《왕과 사는 남자》의 1000만 관객 돌파로 최근 잠시 극장가에 훈풍이 돌긴 했지만, 관람 형태 자체가 변모한 만큼 낙관하긴 힘들다.

극장의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진 못하겠지만, 그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는 영화가 3월18일 공개됐다. 세 편의 단편을 묶은 앤솔로지 영화 《극장의 시간들》이다. 《극장의 시간들》은 오랜 시간 광화문을 지켜온 예술영화전용관 '씨네큐브'의 개관 25주년을 기념한 작품이다.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영화 산업 지원을 논하기 위해 관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출로 참여한 감독 면면이 든든하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탈주》 《파반느》로 탄탄한 필모를 쌓아가고 있는 이종필 감독, 《우리들》 《우리집》에 이어 지난해 《세계의 주인》으로 존재감을 넓힌 윤가은 감독,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국이 싫어서》 등으로 위로를 건네는 장건재 감독이 각자의 시각에서 극장이라는 공간과 영화의 의미를 조명했다.

 《침팬지》 ⓒ티캐스트

《침팬지》, 함께했던 시간은 남는다

이종필 감독의 《침팬지》는 2000년 광화문으로 관객을 실어 나른다. 20대의 고도(원슈타인 분)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른 헌책방에서 한국으로 수입된 침팬지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다. 고도는 씨네필인 친구 제제(홍사빈 분), 극장에서 마주친 후 가까워진 관객 모모(이수경 분)와 함께 책 속에 등장한 침팬지를 찾아 나선다. 시간이 흘러 영화감독이 된 40대 고도(김대명 분)는 다시 광화문을 찾고, 운명처럼 헌책방에서 다시 그 책을 발견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책 속에 기록된 침팬지 내용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다르다. 고도의 기억 속에 있는 침팬지는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침팬지》가 조명한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쌓여가는 장소로, 추억이 저장되는 장소로 극장이 기능한다. 침팬지에 대한 고도의 정보와 기억이 맞는지 틀린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그때 그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극장에서 웃고 울며 20대의 한 자락을 공유한 친구들과 나눈 온기는 여전히 고도의 마음에 남아 그가 영화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추억은 힘이 센 법이니까. 아니, 극장의 힘이 센 것일까.

《자연스럽게》 ⓒ티캐스트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연기란 뭘까

제목부터 참으로 윤가은스러운 작품이다. 한여름의 영화 촬영 현장. 아역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던 감독(고아성 분)은 조금 더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낼 방법을 고심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은 특유의 솔직함으로 "어떤 게 자연스럽지 않다는 거지?"라고 천진난만하게 응수한다. 영화 속 영화를 그린 작품으로 윤가은 감독이 극 말미에 실제로 등장해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지운다. 아역배우들로부터 자연스러운 연기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윤가은 감독의 필살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더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감독님, 이렇게 비법을 공개해도 되겠어요?).

이 에피소드의 주연을 맡은 고아성은 《극장의 시간들》에 참여한 감독 모두와 한 번씩 작업을 해본 배우다. 이종필 감독과는 《파반느》에서, 장건재 감독과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먼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것으로 알려지는데, 영화라는 게 사실 그렇다. 의도하지 않은 게 모여 의미를 만들어내는 게 영화라는 마법의 세계다. 결과적으로 고아성의 존재가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필터로 기능하는 느낌이다. 세 명의 감독이 고아성이라는 동일한 피사체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또 하나의 관람법이 될 듯하다.

《영화의 시간》 ⓒ티캐스트

《영화의 시간》, 극장이란 공간 속 사람들

마지막은 장건재 감독의 《영화의 시간》이다. 도입에서부터 차별화를 꾀했다.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영화 만든 사람들' 이름을 오프닝에 배치하고, 이를 직접 읽어주는 내레이션을 삽입했다. 배우, 각본, 프로듀서, 조명, 미술, 의상 메이크업, 동시녹음, 현장 편집은 물론 단역배우 이름까지 일일이 읊으며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의 시간이 함께하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춘천에 사는 영화(양말복 분)가 우연히 찾은 광화문 극장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여고생 동창(장혜진 분)을 만나는 이야기가 《영화의 시간》의 큰 줄기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극장에 꼭 필요하지만 덜 부각돼온 존재들에게 시선을 돌린 세심함에서 온다. 매표원, 청소노동자, 영사기사 등이 릴레이로 등장하며 극장의 시간을 채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려고 반차까지 내고 왔는데, 상영 시간에 늦어 발길을 돌리는 '관객'(문상훈 분)도 극장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극장의 시간들》 에필로그 ⓒ티캐스트

《극장의 시간들》을 특별하게 하는 또 하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다. 씨네큐브 영사실에서 실제로 20년 이상 근무한 홍성희 영사실장이 처음과 끝에 등장해 의미를 더한다. 특히 홍성희 영사기사가 청년 영사기사(심해인 분)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모습은, 세대가 바뀌어도 극장이라는 공간은 이어질 것이란 희망을 그려낸다.

다시금 던지는 질문. 당신에게 극장은 어떤 공간으로 남아있나. 《극장의 시간들》을 다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문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질문에 대해 최근 스티븐 스필버그가 한 멋진 대답이 있어 소개한다. "나에게 있어 진정한 영화 경험은 낯선 사람들이 어두운 공간에 모일 때 찾아온다. 우리는 모두 낯선 사이지만 영화가 끝날 때면 수많은 감정을 공유하며 햇살 속으로, 혹은 어둠 속으로 함께 걸어 나간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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