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해지는 나날, 욕망·진혼제·사랑 담은 공연 3선
절절한 진혼제 뮤지컬 ‘홍련’
사랑의 여러 빛깔 연극 ‘슈만’
포근해지는 나날, 공연 보기 딱 좋다. 유쾌하게 웃고 싶거나 묵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 잔잔하게 사랑의 감정을 곱씹어보고 싶을 때 보기 좋은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연극 ‘불란서 금고’
욕망이란 거울에서 만난 나
은행 지하의 비밀 금고에 모인 다섯 명. 자정에 모든 전기가 나가면 금고를 열기로 한다. 맹인 교수 밀수꾼 건달 은행원은 서로가 누군지 모른다. 각자 원하는 것도 다르다.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공조해야만 하는 상황. 긴장 속에 갈등은 점점 높아지고 상황은 예측할 수 없이 흘러가는데….
장진이 10년 만에 새로 선보이는 코미디 연극이다.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장진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균열이 발생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특유의 장기를 보여준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절제하며 인간 내면의 욕망을 깊숙이 비춘다. 세상사의 순리를 멀찍이서 조망하듯 그려낸다.

장 연출가는 지난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한 신구 배우를 보고 “자신의 작품에 모시고 싶어” 이 작품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신구가 연기하는 맹인은 놀라운 청력으로 금고를 여는 재주를 지녔다. 청진기로 다이얼의 톱니바퀴 소리를 들으며 금고를 여는 과정을 하나의 예술로 여긴다.
맹인이 내내 읊조리는 북벽 우화는 극을 관통하는 메시지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깎아내린 듯 가파른 돌 절벽, 가장 높은 봉우리가 북벽이었고 그 위에 오른 자가 상좌를 틀어 모든 걸 가져갔다. 북벽에 오르면 아래 세상이 훤히 보였고, 구름도 발 아래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지.” 연극 부제가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다.

90세 신구는 모든 것에 초탈한 듯 하다가도 다른 이들을 능청스레 쥐락펴락하는 맹인 캐릭터 그 자체다. 성지루도 맹인 역에 함께 발탁됐다. 논리를 앞세우지만 뭔가를 숨기는 교수, 물질을 통해 맛보는 쾌감은 시들해져 더 높은 차원의 만족감을 갈망하는 밀수꾼, 소심해 보이지만 반전 면모를 지닌 은행원,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건달. 색깔 또렷한 캐릭터를 맛깔나게 소화한 배우들은 극의 밀도를 높인다.
교수는 장현성 김한결, 밀수꾼은 정영주 장영남이 연기한다. 건달 역에는 최영준 주종혁, 은행원 역에는 김슬기 금새록이 발탁됐다. 조달환 안두호가 뜻밖의 인물로 등장해 웃음을 더한다.
5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놀(NOL) 서경스퀘어 스콘1관. 중학생 이상 관람 가능.
●뮤지컬 ‘홍련’
짓밟힌 이들을 위한 진혼제
아버지를 죽이고 남동생을 해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홍련. 이를 모두 인정하지만 재판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천도정의 주인으로 홍련의 재판을 이끄는 바리는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저승차사 강림, 천도정의 호위무사 월직차사와 일직차사도 함께 한다.
한국 전통 설화 ‘장화홍련’과 ‘바리데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남동생에게 잔인하게 짓밟히고,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지만 병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까지 다녀온 서사를 신선하면서도 아프게 이었다. 2024년 초연된 창작 뮤지컬로 이번이 두 번째 공연이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홍련, 그런 홍련을 다독이고 때로 압박하는 바리 간 신경전이 팽팽하게 이어진다. 열기는 점점 달아오르고 마침내 진실이 드러나며 에너지가 폭발한다. “죽어야만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라는 외침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기에 가슴이 저릿하다.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차츰 무너지고 끝내 절규하는 홍련, 기어이 자신의 상처를 끄집어내게 만든 홍련을 품어주는 바리는 무대에 빠져들게 한다. 한을 씻어내는 의례는 보는 이의 마음도 달래준다. 록 음악과 씻김굿 선율이 강렬함을 더한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토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깊은 여진을 던지는 수작이다.

홍련 역은 이지혜 강혜인 김이후 홍나현이 맡았다. 바리는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이 연기한다. 강림 역은 이정수 신창주 이종영이 맡았다. 월직차사 역에는 김대현 백종민, 일직차사 역에는 신윤철 정백선이 발탁됐다.
5월 17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14세 이상 관람 가능.
●연극 ‘슈만’
사랑의 빛깔들 우아한 선율로 자아내다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잘 알려진 이야기를 각기 다른 빛깔의 사랑으로 섬세하게 그렸다.
1853년 독일 뒤셀도르프. 거장 음악가 부부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이 사는 집에 젊은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가 방문한다. 브람스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로베르트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모든 걸 쏟아 붓는다. 브람스는 천재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에게 빠져든다. 스승의 아내로 열네 살 많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순 없다.

음악을 통해 교감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을 입체적으로 비춘다. 창작극으로 2023년 초연됐다.
박상민은 클라라의 천재성을 질투해 더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길 바라면서도 죄스러워하는 로베르트를 흡입력 있게 표현한다. 아내에 대한 브람스의 감정을 외면하며 애쓴다. 마비되는 육체, 흐려지는 정신에도 음악을 놓지 않는 모습을 실감하게 연기해 음악은 그의 전부임을 온 몸으로 호소한다.
브람스에게 흔들리지만 남편에게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클라라. 그에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책임이었다. 남편의 음악 세계는 물론 일상을 지탱하게 해주는 게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브람스는 동경하던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지만 결국 클라라의 뜻을 존중한다. 로베트르가 세상을 떠난 후 클라라와 그 자녀들을 위해 생활비를 지원하고,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이 순간의 흔들림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것.

슈만과 브람스의 익숙한 음악은 우아함을 더한다. 브람스가 홀로 피아노로 치다 클라라와 함께 연주하는 ‘헝가리 무곡’. 이 곡이 이토록 설레고 낭만적이었던가.
4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더굿씨어터. 12세 이상 관람 가능.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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