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장악한 中의 '탄소 역공'…한국은 속수무책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이 ‘탄소’를 앞세워 배터리 산업의 규칙을 다시 짜고 있다. 올해부터 배터리의 전과정 탄소배출(LCA) 관리 체계를 시작하면서, 제품의 탄소 배출 수준이 곧 경쟁력이 되는 구조를 만들고 있어서다. 중국 정부는 배터리뿐만 아니라 전기차, 태양광 등 '3대 전기화 품목' 전반에 대해 탄소 관리 제도를 단계적으로 도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자국 기업의 탄소 관리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기준에 못 미치는 해외 기업을 걸러내는 교묘한 무역 장벽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문제는 한국의 대응 체력이다. 국내 탄소 가격이 지나치게 낮은 탓에 기업들은 전기화 기술에 투자할 '경제적 유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규제에 대응할 기술적 맷집을 미리 기를 수 있도록, 탄소 가격 현실화 등 시장에 명확한 투자 시그널을 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기화 혁신 기업에 인센티브
18일 정유·화학 업계에 따르면 수천억원을 들여 블루수소 생산 설비에 투자해도, 정작 수소 수요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 설비를 100% 가동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배출권 판매 등 감축 인센티브를 통해 투자비를 보전하고 수익을 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투자비 회수조차 먼 얘기다. 배출권 가격이 너무 싸기 때문이다. 배출권 가격은 지난해 9월 t당 1만 원 안팎에서 최근 1만6000원 수준까지 올랐지만, 유럽(약 8만 원), 미국(약 3만 원)에 비하면 여전히 낮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고가의 전기화 기술을 도입하기보다 저렴한 배출권을 사서 규제를 맞추는 쪽을 택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탄소 가격제(Carbon Pricing)’가 화석연료 기반 공정과 전기 기반 공정 간 비용 격차를 줄여 산업 전기화를 유도하는 핵심 정책 수단이라고 본다. 탄소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 올라줘야 기업들이 비싼 전기나 수소 설비를 써도 화석연료 설비를 쓸 때보다 이득을 보는 ‘경제적 역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탄소 가격이 1만 원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기업들의 ‘감축 계산기’는 멈춰 섰다. A기업 관계자는 “지금 가격으론 탄소저감·전기화 기술을 갖다 쓰는 것보다 그냥 저렴한 배출권을 사서 때우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B기업 관계자는 “탄소 가격이 급격히 오르면 기업에 부담이 되는 건 맞지만, 이미 투자한 기업 입장에서는 가격이 어느 정도 올라야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기업들의 내부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업이 투자 판단을 위해 자체적으로 설정하는 ‘내부 탄소 가격’조차 기존 10만원 가량에서 1만원 수준으로 낮추는 사례가 늘고 있다.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의 한국지사 관계자는 “탄소 값이 너무 낮아 원금 회수 기간이 길어지고 경제성이 떨어지니 관련 투자를 위한 내부 보고조차 올리기 힘들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전기화 설비나 공정 개선 같은 실질적인 감축 투자가 작동하려면 탄소 가격이 최소 4만~5만 원 수준은 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C사 관계자는 "CCUS 같은 대규모 사업의 경우 판을 키우려면 탄소 가격이 10만원까지 돼야 기업들이 경제성 있다고 보고 움직일 것"이라고 봤다.
○균형점 찾는게 관건
이처럼 기업들이 탄소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배출권거래제의 원리 때문이다. 배출권거래제는 국가가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총량)을 정해 놓고, 이를 기업들에 일단 무상으로 나눠주되 해마다 그 총량을 줄여가는 제도다.
유상할당이 늘어나면서 기업들은 무료로 받던 배출권 일부를 점점 돈을 주고 사야 하기 때문에, 배출을 줄이지 않으면 비용 부담이 커진다. 정부는 이런 원리를 활용해 감축 효과가 확실한 고효율 기업에 인센티브를 집중하는 방식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다.

핵심은 과거 배출량 기준(GF)에서 배출 효율 기준(BM)으로 할당 방식을 전면 개편하는 것이다. 정부는 배출권거래제 4기(2026~2030) 할당 계획에서 BM 적용 대상을 기존 62%에서 77%까지 대폭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권동혁 BNZ파트너스 부대표는 "벤치마크(BM) 할당은 제품 생산량 대비 탄소를 적게 배출한 기업에 배출권을 더 많이 몰아주는 '당근'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화력발전소가 수소를 섞어 태워 탄소를 줄이면 남는 배출권을 팔아 돈을 벌 수 있고, 유상할당 비중이 높아질수록 이런 전기화 기술의 몸값은 더 뛴다. 두산에너빌리티나 한화임팩트 같은 제조사는 수소 혼소 기술을 발전소에 비싸게 팔아 수익을 얻고, 그 돈으로 탄소를 아예 안 내뿜는 ‘수소 전소 터빈’까지 개발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정부는 벤치마크 할당 확대와 더불어, 탄소감축 설비 경매제도 도입했다. 이 제도는 기업이 전기화 기술 등으로 인한 탄소 감축 비용을 스스로 계산해 낮은 가격을 써낸 순서대로 정부 보조금을 주는 '오디션'이다. 향후 도입될 탄소차액계약제(CCfD)의 복잡한 구조에 기업들이 미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브릿지(연착륙)' 성격이 강하다. CCfD는 탄소 가격이 예상보다 계속 낮을 경우 투자비의 차액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기업들이 초기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결국 핵심은 ‘적정 탄소 가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가격이 너무 낮으면 감축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반대로 너무 높으면 산업 경쟁력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대균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소장은 “적정 탄소 가격은 기업을 규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전기화 같은 저탄소 기술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신호”라며 “중국과 유럽이 이미 탄소 기준 경쟁에 들어간 만큼 한국도 균형 잡힌 가격 설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LCA 의무화로 자국 기업을 저탄소 표준에 맞게 조련하는 동안, 우리나라도 기업들이 공정을 전기로 바꾸는 ‘전기화 혁신’에 뛰어들 수 있도록 시장 신호를 정교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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