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만나리니

문화부 2026. 3. 18. 10:38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대다수가 완독하지 못한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숙종대왕 시기 남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정절과 계급의 이야기는 파격 그 자체다.

같은 맥락으로 '춘향전'에선 기생의 딸이라고는 하나 열여섯 살 남녀가 혼전 성행위를(그것도 처음 만난 날 밤에)한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책] 춘향전
송성욱 풀어옮김/ 민음사 펴냄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대다수가 완독하지 못한 소설이 있다. 예컨대 '노인과 바다', '죄와 벌', '돈키호테', '위대한 개츠비', '코스모스' 등. 이 정도는 그래도 약과다. 애초에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그러나 내용은 익히 아는 국민소설, 새파랗게 어린 이몽룡과 성춘향이 어쩌고저쩌고, 곁다리로 방자와 향단이까지 연애질에 몰두하는(걸로 알고 있는) 그 이야기, 바로 '춘향전'이다.

'춘향전'은 이본(異本)이 100여 종을 넘고 제목도 각기 다르다. 당시 유통 방식을 고려할 때 이본은 당연한 거지만, '춘향전'만큼 이본에 따른 편차가 심한 작품도 드물다. 달리 보면 그만큼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는 방증이다. 완판 '열녀춘향수절가 84장본'과 '춘향전 경판 30장본'이 대표적인데 완판 84장본은 별춘향전 계열이 개작을 거듭해 19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남원고사와 더불어 현존하는 춘향전 중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이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 '춘향전'은 문학적 명성만큼이나 한국 영화사에 남긴 족적도 크다.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가 '춘향전'이고 1971년 문희, 신성일이 주연한 버전은 최초의 70㎜ 대형영화로 기록됐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건 1999년 임권택 감독과 조승우, 이효정 주연의 '춘향전'이다.

먼저 춘향전 경판 30장본은 익히 우리가 아는 춘향전 내용 그대로다. 일견 완판 84장본의 축약 버전인 듯하지만, 시대적 배경과 인물 설명(인조대왕 시기와 이 도령을 바람둥이로 묘사한다든지)에서 차이를 보인다. 열녀춘향수절가 84장본은 우리가 아는 춘향전의 큰 맥은 다르지 않으나 인물 설명과 감정과 심리 변화까지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머릿속의 '춘향전'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린다. 이를테면 숙종대왕 시기 남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정절과 계급의 이야기는 파격 그 자체다.

중학교 시절, 삼중당 문고로 읽은 박계주의 '순애보'(종교적 사랑을 그렸다고 들었다.)는 인물들의 성행위를 자세하게 묘사해놓아 나를 달뜨고 아득하게 만들었다. 같은 맥락으로 '춘향전'에선 기생의 딸이라고는 하나 열여섯 살 남녀가 혼전 성행위를(그것도 처음 만난 날 밤에)한다. 21세기에도 보편적이지 않은 일이 17세기 남원 땅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니.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날 며칠 "즐기다가 날이 새면 몸을 숨겨 돌아오고, 어두우면 천방지축 달려가서 매일 놀고 자취 없이 다닌 지가 여러 날이" 되도록 서로를 탐하는 과정을 자세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그 수위만으로도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심지어 춘향의 정절을 임금이 칭찬해 정렬부인으로 봉하고 급제한 이 도령은 훗날 "이조판서 호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다 지내고 퇴임한 후에 정렬부인으로 더불어 백년동락" 했다고 적고 있으니, 당시 평민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판타지가 또 있으랴.

영화평론가 백정우

사또의 자제가 기생의 딸과 정혼을 약속한 후 정경부인까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적은 이름 없는 창작자는 계급과 신분의 벽이 견고했던 당대 백성의 욕망을 읽었을 터. 영화로만 18번 이상 만들어졌다는 건 '춘향전' 서사에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모든 이들의 보편적 욕망이 담겼음을 증명한다. 웬만해선 책 추천하는 걸 꺼리지만, '춘향전'은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을 만날 테니까.

영화평론가 백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