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유창선 우리 곁 떠났지만…‘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 당신 말은 삶의 등불[그립습니다]


남편 유창선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12월 어느 겨울날이었다.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 많던 시절, 일곱 살 많은 그는 내게 담담하게 청혼을 했다. 집안이 망했다는 솔직한 고백과 함께였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래도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플 때 돌봐주고 평생 무심하지 않겠다.” 그 말에는 화려한 약속 대신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진심을 믿고 그의 곁에 서기로 했다.
결혼을 결심하면서 마음속에 작은 다짐이 하나 생겼다. 남편이 자신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경제적 이유가 먼저 앞서지 않도록 가장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었다. 가장으로서의 몫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신혼의 소꿉놀이 같던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우리 삶은 바빠졌다. 육아와 일상이 겹치는 시간 속에서도 남편은 늘 차분하고 온화했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갈등이 생기면 감정보다는 설명으로 풀어냈다. 그가 화가 났을 때 가장 강하게 했던 말은 “자꾸 그러면 나랑 멀어진다”였다. 그 한마디에는 관계를 지키려는 마음과 스스로를 절제하는 품격이 담겨 있었다.
남편은 집안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육아를 함께했고, 성인이 된 딸들이 바쁠 때면 직접 밥을 차려주기도 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따로 나누기보다 서로의 상황에 맞게 책임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사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이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평온하던 삶이 흔들린 것은 2019년, 남편이 뇌종양 진단을 받으면서였다. 간단한 수술로 끝날 줄 알았던 병원 생활은 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긴 투병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몸이 지쳐 보이는 순간에도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인간의 강인함이 무엇인지 새삼 느꼈다.
수술 후유증으로 더 이상 방송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시사평론가에서 문화평론가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다. 따뜻한 글을 쓰고 좋은 책을 남기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여전히 또렷했다.
어느 날 그는 조심스럽게 자전적 에세이를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늘 자신의 글과 책에 대해 내게 허락을 구한 적 없던 사람이었다. 나는 왠지 모를 마음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았다. 가벼운 감기처럼 시작된 병세는 너무도 빠르게 남편을 데려갔다.
남편이 떠난 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글도 읽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 절망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남편의 글을 찾아 읽고 따라 쓰는 것이었다. 글 속에서 나는 다시 남편을 만났고, 그의 숨결과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남겨진 노트북에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자서전 원고가 있었다. 수많은 시대의 굴곡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온 남편은 유작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사진)를 통해 우리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삶은 때로 넘어지게 하지만, 다시 일어나는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32년 동안 변함없이 아끼고 사랑해 준 사람. 그가 남긴 말과 글은 이제 우리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 남아 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그 단순하고도 단단한 믿음처럼, 나는 오늘도 그를 떠올린다.
아내 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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