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 앞 희미해진 개인사… “그런 세계 살아가는 인물 심리에 주목”
김연수‘우리들의 실패’ 국정개입 연루됐지만 파산 각오하고 폭로
“주인공의 선택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삶 속 얽힌 관계와 감정 얘기”
히라노‘결정적 순간’ 존경한 사진작가 전시 준비중 나체사진 발견
“일회적인 사건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나가려는 태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우리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젊은 작가들”이었다고 회고한 한국과 일본의 작가가, 20여 년이 지나 양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로 마주 앉았다. 숱한 베스트셀러를 남긴 ‘작가들의 작가’ 김연수(56)와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 후 독보적 세계를 구축해온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51) 얘기다. ‘윤리적 딜레마’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두고 각기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이기 위해서다. 국내외 작가가 같은 주제로 중단편 소설을 쓰고,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출판사 북다의 기획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두 작가는 각자의 소설이 담긴 책 ‘근접한 세계’가 출간된 것을 계기로 서면 인터뷰에 응했다.
◇화상회의로 정한 키워드 ‘윤리적 딜레마’= “윤리적 딜레마를 주제로 각자 소설을 써보자고 합의한 것은 2024년 12월 초의 일이었고, 히라노 작가는 물론 저 자신도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궁금했습니다.”(김 작가)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두 작가의 화상회의는 그해 초 북다가 국내외 작가들의 공동집필 기획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윤리적 딜레마라는 키워드는 “아무리 재미있는 내용이라도, 아포리아(난제)를 내포하지 않은 것은 문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온 히라노 작가가 제안했다고 한다. 이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다양한 가치가 소용돌이치는 시대와 공명하는 주제. 김 작가 역시 “쉽지 않은 주제이지만 소설가로서는 매력적인 주제”라는 데 동의했다.
◇로컬리티가 빚어낸 세계… 韓 김연수 “한국사가 배제한 개인의 서사 조명”= 김 작가는 자신의 소설 ‘우리들의 실패’의 주인공 손동하에 대해 “(독자의) 갸웃거림을 위해 택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통령 친인척의 국정개입 사건에 연루됐으나 파산과 구속을 각오하고 이를 폭로한 인물이자,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비논리적 결단을 하는 인물”이다.
다만 이야기의 주가 되는 것은 딜레마 속에서의 결단(폭로)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의 배경이 되는 개인의 역사. 손동하를 움직인 것은 ‘대의’가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된 목소리, 우연히 읽은 잡지기사, 그에 얽힌 과거였다. 작가는 손동하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삶을 끌어온다”면서 그 삶 속에는 여러 사람과 얽힌 ‘관계’와 거기서 파생되는 ‘감정’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작가가 지극한 개인사를 중심에 놓은 것은 역으로 한국의 사회역사적 상황과 관련돼 있다. 작가는 “한국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이야기를 배제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때문에 작가로서 “배제된 개인의 비논리적 서사”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작품에는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등의 사건도 등장하는데, 작가는 “탄핵 정국에서 느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도덕경 속 문장 등 몇 가지 이야기가 필요했고, 그것들이 결국 이 소설을 쓰게 했다”고도 말했다.
◇日 히라노 “중요한 것은 제도 속 사유하는 개인”= 히라노 작가의 ‘결정적 순간’은 공립미술관의 큐레이터 ‘미즈마키 가스미’라는 인물을 내세우면서다. 자신이 오랜 시간 존경해왔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가 사카키 미노루의 개인전을 준비하는 인물. 그 과정에서 사카키가 찍은 소년의 나체 사진을 발견한 후, 전시 강행 혹은 무기한 연기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작가는 “(미즈마키는) 제도적으로 하나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지만 자신의 사유에 비추어 납득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면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독선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사유해 나가는 일” 그 자체라고 말했다. “사건을 일회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나가려는 태도가 적어도 그 시점에서 그녀의 결정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했다.
작품에는 일본 공립미술관의 보수적 운영 구조, 미투 운동 이후 일본 사회 분위기, 저명 사진작가의 전쟁 협력을 둘러싼 논란 등이 언급된다. 작가는 “일본 내 구체적인 사건보다는, 도쿄도의 미술관 행정과 같은 제도적 관점과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통해 현대성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공통감각, “韓 소설 제목 日 노래 제목에서 와”= 소설에는 각국 특유의 상황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작가들의 시각이 등장하지만, 다름을 넘어선 공통 감각도 엿볼 수 있다. 특히 김 작가의 소설 제목 ‘우리들의 실패’는 일본 가수 모리타 도지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노래에는 일본에서 학생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전공투 세대의 실패담이 들어 있는데, 이는 한 시대의 실패담이 아니라 청춘 그 자체의 실패담”이라면서 “청춘의 실패담이란 패배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에 “우리들의 실패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는 그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히라노 작가의 소설 속 등장하는 기관의 의사결정 구조, 미투 상황 등도 한국 사회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이처럼 다른 듯 닮은 세계가 수렴하는 순간, 독자들은 우리 모두가 결국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김연수
1970년생.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로 데뷔.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고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장편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 ‘일곱 해의 마지막’ 등을 펴냈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 히라노 게이치로
1975년생. 1999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작품 ‘일식’으로 제12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 소설 ‘장송’ ‘센티멘털’ ‘본심’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고 여러 나라에 번역·소개됐다. 요미우리 문학상과 일본 서점대상을 수상했다. 2024년 소설집으로는 10년 만의 신작인 ‘후지산’을 펴냈다.
인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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