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들여 '새 길' 안 깔아도..."에너지 교통정리된다" 제주서 찾은 답

권다희 기자 2026. 3. 1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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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에너지리포트]전력 패러다임 바꾸는 분산에너지 (下)
[편집자주] 기후변화 대응를 비롯해 에너지안보와 인공지능(AI) 고도화 등 다양한 변수가 에너지 생산·이용·소비의 모든 과정을 급속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머니투데이가 이같은 변화가 지속가능하게 이뤄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다양한 주제를 통해 제시해본다.
제주서 시작한 재생에너지 '교통정리', 전력망 포화 줄인다
제주 vs 전국 재생에너지 비중 예상치 비교/그래픽=최헌정

제주에서 시작된 전기차-전력망 연계(V2G) 실증, 계통연계형 에너지저장장치(BESS), 재생에너지 입찰제도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태양광, 풍력, 배터리처럼 흩어진 자원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 답 가운데 하나가 한국전력이 제주에서 운영 중인 유연성 자원 플랫폼이다.

◇한전, 재생에너지 늘어난 제주서 새 플랫폼 개시

이 플랫폼은 한전 배전망사업실 주도로 지난해 1월 제주본부에 문을 연 DSO-MD(Distribution System Operator-Market & Dispatch)를 가리킨다. 재생에너지로 대표되는 분산 에너지 사업자들의 전력시장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24년 6월부터 시행 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법적 근거다.

한전 제주본부에서 만난 김건호 전력연구원 배전연구소 유연배전연구실 선임연구원과 고민식 한전 제주본부 배전망사업부 연계운영팀 차장은 이 플랫폼을 "분산에너지 교통정리 시스템"이라 표현했다. 태양광이나 풍력발전기처럼 곳곳에 흩어진 에너지가 전력망에 과부하를 주지 않고 안전하게 흐를 수 있도록 조절한다는 의미다.

이 설명은 제주가 왜 이 플랫폼의 출발점이 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주에선 태양광이 많이 깔리면서 낮에는 발전량이 급증하고, 해가 지면 빠르게 줄어드는 일이 반복된다. 전기는 항상 수요와 공급이 맞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정전이나 과전압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김 선임연구원은 "제주는 분산에너지가 많아 해가 뜨면 발전량이 과도하게 늘고 석양과 함께 급격히 줄어드는 특성이 강하다"며 "이 자원과 전력공급의 안정성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러 기술을 개발해 왔고 법적 근거가 생기면서 플랫폼이 출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전 제주본부에서 만난 김건호 전력연구원 배전연구소 유연배전연구실 선임연구원(사진 오른쪽)과 고민식 한전 제주본부 배전망사업부 연계운영팀 차장/사진=권다희 기자

◇전력망 안정 위한 재생에너지 '오케스트라'

고 차장은 플랫폼의 역할을 "오케스트라 지휘"에 비유했다. 그는 "예전에는 큰 발전기 몇 개만 조정하면 됐기 때문에 흐름 조절이 상대적으로 쉬웠다"며 "하지만 지금은 전기가 소비지 가까운 곳에 작은 형태로 흩어져 들어오고, 구름이 끼면 태양광 발전량이 갑자기 줄고, 다시 햇빛이 나면 흐름이 바뀌는 전혀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전력계통의 첫 번째 원칙은 안정성"이라며 "흩어진 자원을 조율하는 역할이 있어야 재생에너지 확대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유연성 자원 플랫폼은 "무엇을 먼저 쓰고, 무엇을 나중에 쓸지"를 가려주는 도구로도 볼 수 있다. 유연성 자원 플랫폼이 가장 자주 작동하는 순간도 전기의 발전이나 소비가 집중되는 시간대다. 감귤 하우스 난방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겨울 밤 시간대 등이 특히 바쁘다. 김 선임연구원은 "유연성 자원 플랫폼은 원활한 전력공급을 위해 어떤 유연자원을 동원할지 판단하도록 돕는다"며 "계통 안정성 확보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안정성을 얻는 방법을 제안한다"고 설명했다. 발전사업자의 운영 자율성을 가능한 한 보장하면서도, 합리적인 계통 운영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제주 및 전국 재생에너지 용량 전망/그래픽=최헌정


◇"재생에너지 확대는 대세"

제주에서 유연성 자원 플랫폼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망 증설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가 많은 지역에서는 흔히 '계통이 포화됐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선로를 깔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실제 전력망 운영을 보면 하루 중 일부 시간대에만 전력 사용이 일시적으로 크게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그 짧은 시간의 수요 증가 때문에 새로운 선로나 설비를 건설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유연성 자원을 활용하면 추가 투자 없이도 기존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제도적으로 보완이 필요한 지점으로는 데이터 공유가 꼽혔다. 민간 사업자와 전력거래소, 한전이 정보를 통합해 운영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고 한다. 처음 시도하는 제도인 만큼 기준도 없었고 사업자는 수익을 추구하고 운영자는 안정성을 우선해야 하는 만큼 서로의 이해를 조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선임연구원은 "유연성 자원 플랫폼과 분산에너지 사업자의 효율적 데이터 공유를 중점에 두고 있다"며 "이를 위해 다수의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듣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 차장은 "재생에너지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그렇게 가기 위해 배전망에 흩어져 있는 자원을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고 더 고도화돼야 하며 육지로도 확대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것이 앞으로 전력산업 환경을 바꿀 중요한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제가 얻는 건요?" 소비자 원하는 것 딱 알아챘다...영국의 '전력망' 혁신
앤드류 피스 에너지시스템 캐터펄트 자문/사진=권다희 기자


# 영국 기업 에퀴와트(Equiwatt)는 가정이 특정 시간대에 전력 사용을 줄이면 앱에서 포인트와 보상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운영한다. 전기를 덜 쓰면 포인트가 쌓이고 순위가 올라가는 일종의 '게임'이다. 목적은 전력 수요 조절이다. 소비자는 스마트폰 게임처럼 참여하지만, 그 결과는 전력망 안정화로 이어진다.

# 영국 에너지기업 옥토퍼스에너지(Octopus Energy)는 지난해 전기차 충전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충전 시간을 제어하는 V2G(vehicle-to-grid) 요금제를 출시했다. 전기차를 리스하면 충전 비용은 회사가 부담하지만 전력망 상황에 맞게 충전 시간을 조정한다. 소비자 편익을 높이면서 동시에 전기차를 전력망 안정화에 기여하는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전력망 혁신, 소비자에게 이익으로 느껴져야"

영국 정부 지원 연구기관 에너지시스템 캐터펄트(Energy Systems Catapult)의 앤드류 피스 자문이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주한영국대사관에서 가진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강조한 것은 "전력망 혁신은 결국 소비자에게 매력적인 서비스로 전달될 때 확산된다"는 점이다. 그는 "소비자들은 전력망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며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그 서비스가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주느냐"라고 말했다.

피스 자문의 메시지는 더 거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영국은 2012년 40%에 달했던 석탄화력발전 비중을 2024년 '제로'로 줄였고 같은 기간 풍력발전을 급격히 늘렸다. 2030년에는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을 95%까지 확대하는 목표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급선무는 달라진 발전원 구조에 맞춰 전력망을 확충하고 운영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지난 20년간 영국 전력 발전원 비중 추이/그래픽=윤선정

◇영국도 송전망 고충…수요 유연성 확대로 기존 망 효율 높여

영국의 고민은 풍력발전소가 대부분 바람이 센 북부 스코틀랜드에 있고 전력 수요는 런던 등 대도시가 있는 남쪽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전력 생산지와 수요지가 떨어져 있는 구조는 한국과도 닮아 있다. 피스 자문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꼽은 것은 굵직한 기반시설이다. 그는 "(북→남 간) 고전압직류(HVDC) 송전망을 확충하면 현재 발생하는 풍력 출력제어(전력이 남아 풍력발전기를 멈추거나 발전량을 줄이는 것)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송전망 병목을 완화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에퀴와트와 옥토퍼스에너지 등이 상용화한 수요반응(DR), V2G 같은 수요 측 유연성 자원이라 짚었다. 그는 "가정용 배터리나 전기차처럼 전력 계량기 뒤(behind-the-meter, 가정 내부에서 운영되는 에너지 자원)자원은 전력망 운영자가 언제 충전되거나 방전될지 알기 어렵다"며 "이런 자원을 플랫폼을 통해 연결하면 전력망을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요 자원이 모이면 네트워크 운영자에게도 중요한 정보가 되고 특정 지역에서 어느 정도 전력 수요를 조정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클린파워 2030' 위한 재생에너지 목표 설비용량/그래픽=임종철

◇"전력 시스템 혁신하려면 데이터 공유 체계 구축 중요"

한국처럼 재생에너지 확대 초기 단계에 있는 국가에서는 시장 구조와 계통 운영 체계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투자자들이 기술에 투자하려면 시장 규칙이 안정적이어야 한다"며 "가격 상한과 최소 수익을 보장하는 가격 상한·하한 제도(cap-and-floor) 같은 제도는 소비자를 보호하면서도 투자 신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계통 연결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제도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건설 계획이 없는 프로젝트들이 대량으로 접속 신청을 할 경우 전력망 운영에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기존 전력망 회사에서 분리돼 정부 산하 기관으로 개편된 국가 에너지 시스템 운영자(NESO)가 이런 역할을 맡고 있다.

인공지능(AI)도 전력망 운영의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네트워크 운영자 협회는 AI 이미지 분석을 활용해 주택 전력 연결 공사의 안전성을 검사한다. 과거에는 현장 점검으로 확인하던 것을 이제는 사진을 분석해 승인 여부를 판단한다. 또 위성 데이터를 활용해 구름 이동을 분석하고 태양광 발전량 변화를 예측한다. AI 기반 변압기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에너지 흐름을 최적화한다.

피스 자문은 "AI는 전력 시스템 전반에서 빠르게 활용되고 있다"면서도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서로 공유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이터 공유 체계 구축이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의미다. 그는 "영국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정부와 기업, 기관 사이에서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공유하는 체계가 전력 시스템 혁신의 핵심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권다희 기자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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