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된 김계리, 그가 삼킨 건 과연 ‘빨간 약’일까

권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과 다르다. 그것은 강압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피지배자의 동의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다. 그런데 피지배자는 어떻게 지배에 동의하게 됐는가? 예를 들어 어떤 신비롭고 고귀한 카리스마에 감복해 왕의 지배에 동의하게 된 것일까? 혹은 복종의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는 사회계약을 맺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왕을 비롯한 지배집단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일까?
권력 현상은 인간 역사의 핵심이며 이에 대한 설명 모델도 다양하게 제기됐다. 좌파는 대체로 폭력·강압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이를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다. 쉽게 말해 지배자들은 폭력으로 강요하는 동시에 피지배자에게 모종의 환상을 체계적으로 주입해 지배를 정당화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지배자들의 속임수를 폭로하고, 기만당해온 대중을 계몽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통적 이데올로기 개념은 좌파의 전유물이라기보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나 데카르트의 ‘악마’ 비유에서 볼 수 있듯 오랫동안 인류의 사고체계에 뿌리박힌 것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을 밝혀 진실을 환히 드러내는 것(enlightenment),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啓蒙)이다. 그것은 개종·회심 같은 종교적 사건이나 각종 음모론, 심지어 극우 지지자의 발언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2025년 2월25일 열린 탄핵심판 최종 변론에서 윤석열의 변호인 김계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14개월 딸아이를 둔 아기 엄마입니다. 비상계엄 후 담화문을 읽고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느라 몰랐던 민주당의 패악과 일당독재,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변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물론 김계리의 말은 그저 개인의 고백일 뿐이어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는 않다. 다만 이 에피소드는 계몽이 상대적 개념이며, 객관적 진실에 대한 깨달음으로 한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로서 가치가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
전통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현대의 시선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사례 중 하나가 영화 ‘매트릭스’(1999)다. 영화 속 세계는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인간은 매트릭스라는 기계장치에 속박돼 가상현실 속을 살아가지만, 세계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하며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주인공 네오도 그런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기묘한 감각을 경험하며 점차 현실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불안 속에 갈팡질팡하다 모피어스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난다. 그는 네오에게 선택지를 내민다. 유명한 ‘파란 약과 빨간 약’ 장면이다. “파란 약을 먹으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게 되고 난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줄 거야.”
네오는 빨간 약을 먹는다. 그리고 모피어스를 따라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고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에 맞선 저항에 동참한다. 빨간 약(red pill)은 세계의 진실을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의 순간을 상징한다. 일단 그걸 먹고 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빨간 약은 영화를 보지 않은 세대조차 그 의미를 알 정도로 유명한 밈이 됐다. 빨간 약은 온라인 극우 남성 사이에선 ‘(남성이 핍박받는) 불편한 진실’을 의미하며 같은 맥락에서 ‘남성 인권’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목이 되기도 했다.

추악한 현실을 바꾸려면 먼저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매트릭스 속에 갇혀 꾸는 꿈, 즉 이데올로기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를 ‘매트릭스 모델’이라 부르기로 하자. ‘매트릭스’는 매력적인 영화지만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실재에 대한 소박한 믿음, 곧 ‘진짜’ 대 ‘가짜’라는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서사의 차원에서는 전형적인 음모론에 해당한다. 세계의 실상은 은폐돼 있고 대다수가 속고 있으며 계몽된 소수만이 이를 직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지적 엘리트주의 혹은 선민사상과 이어진다.
‘매트릭스 모델’, 즉 전통적 이데올로기 개념은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에 쓴 문장,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요약되기도 한다.1 ‘매트릭스 모델’은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지만, 그만큼 허점도 많아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지배구조가 지배자의 기만과 피지배자의 무지 때문에 지속된다는 가정은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너무 단순한 이해라는 지적이 많았다. 루이 알튀세르도 전통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비판한 이론가 중 하나였다. 그는 호명(interpellation) 개념을 통해서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기만이 아니라 주체를 생산하는 물질적 실천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호명 자체의 원인, 즉 왜 호명이 발생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주체가 최초로 호명되는 기원적 순간, 다시 말해 권력에 의해 이름이 불리면서 피지배자로서의 주체가 ‘탄생’하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음에 따라 ‘왜 개인이 호명을 받아들여 주체가 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게 인간은 항상-이미 주체인 존재이다. 알튀세르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2 호명이 주체를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예전에는 없던 주체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체가 ‘발현’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 그렇게 한다
알튀세르의 설명은 난해하지만 논리적 결론이기도 하다. 만약 호명으로 주체가 ‘탄생’한다고 할 경우, 호명 이전에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을 명확히 구별하는 경계선 혹은 기준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상태 혹은 ‘이데올로기 바깥의 날것의 진실’을 설정하는 셈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앞서 매트릭스 모델의 ‘진짜’ 대 ‘가짜’ 이분법으로 회귀해버리고 만다.
알튀세르를 중요하게 참조했지만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를 사유한 현대 철학자도 있었다. 대표적인 이로 주디스 버틀러와 슬라보이 지제크 등이 있다. 지제크는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생산하는 물질적 실천’이라는 알튀세르의 논변이 좌파의 이데올로기론을 크게 진전시켰음을 인정하면서도, 알튀세르가 핵심적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알튀세르가 기각했던 ‘왜 호명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지제크가 보기에 이 질문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답변돼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의 호명, 곧 알튀세르의 유명한 비유인 “어이, 거기 당신!”이라는 경찰의 부름에 대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호명 이전에 호명을 알아듣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해 많은 이론적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 모두 살펴볼 여유는 없다. 지금은 전통적 이데올로기론과 대비되는 지제크의 이데올로기론을 간략히 소개하고 논평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지제크는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냉소주의’ 분석과 정신분석학, 특히 자크 라캉의 이론 틀을 빌려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론을 주조했다. 슬로터다이크는 오늘날 사람들이 전통적 이데올로기 명제, 즉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가 아니라, 현대적 냉소주의의 명제인 “그것을 알지만 그렇게 한다”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 이름 붙였다.3 지제크는 이 냉소적 주체 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매트릭스 모델’의 치명적 한계
지제크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배계급의 기만과 체제의 모순을 잘 알지만 그걸 몰랐던 때와 똑같이 행동한다. 왜일까? 이데올로기는 실재를 은폐하는 환각(illusion)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환상(fantasy)이기 때문이다.4 이제 이데올로기는 앎의 문제, 즉 지식이나 인식이 아니라 욕망, 환상, 동일시, 사회적 관행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제크의 이러한 이데올로기론을 매트릭스 모델에 대비하여 (이데올로기의) ‘냉소적 주체 모델’이라 부를 수 있겠다.
‘매트릭스 모델’, 즉 이데올로기를 기만과 허위의식으로 보는 관점은 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며 현실 설명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이데올로기 바깥’을 상정해 이데올로기와 구별하는 인식론은 ‘이데올로기 바깥이라는 관념도 이데올로기라면 어쩔 것인가?’라는 질문, 곧 인식의 악무한적 퇴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반면 ‘냉소적 주체 모델’, 즉 이데올로기를 ‘계몽된 허위의식’ 또는 환상적 동일시 등으로 보는 관점은 현실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지만,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그중 하나는 환상 개념의 근본적 모호성이다. 철학자 진태원은 이 때문에 ‘지제크가 환상을 사실상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지배집단의 조작처럼 여기고 있다’는 취지로 비판한다.5
이를 염두에 두면 훗날 지제크가 “신적 폭력”, 즉 ‘도덕적 정당화 없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폭력’에 대한 강조로 흐르게 된 것도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지배구조의 전능과 영속을 암암리에 전제한다.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든 알면서 그렇게 하든, 사람들이 체제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에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배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막강한지 치밀하게 분석할수록 그것이 어떻게 균열하거나 붕괴하는지에 대한 논의와는 멀어지기 쉽다.
권력은 전능하지 않다
체제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통치술이 완벽하고 체제가 빈틈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피지배자들은 종종 냉소적 주체로서, 즉 체제의 기만을 알지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때로는 마치 기만을 처음 깨달은 것처럼 분노에 휩싸여 체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요컨대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잘 작동하지만은 않는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를, 지배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경합하는 이데올로기-들을 분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 바로 감정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1. 카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자본론 1 정치경제학 비판’, 비봉출판사, 1995. 책에서 해당 문장은 상품 물신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2. Althusser, L.,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Notes pour une recherche)’, ‘La Pensée’ no 151, juin 1970 / 김동수 옮김,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출판사, 1991
3. 페터 슬로터다이크, 이진우·박미애 옮김, ‘냉소적 이성 비판', 에코리브르, 2005
4. Žižek, S.,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Books, p30, 1989
5.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 상상계와 이데올로기’, ‘스피노자의 귀환’, 민음사, 2017
박권일 미디어사회학자
*우리 안의 극우: 오늘의 극우는 한국 사회에 이미 존재하던 문제들이 고름 터지듯 분출되는 현상이다. 이 연재는 내재적 관점에서 극우를 직시하는 연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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