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언어 우리 일상어로… “번역은 영어보다 한국어 실력이 90%” [마이 라이프]
소년의 ‘과학 유전자’
아버지가 땅에 그린 아폴로 11호 기억
엉터리 번역된 과학책 보며 번역에 뜻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번역해 대흥행
2년 동안 ‘뉴턴의 17세기 미로’ 겪기도
“번역가는 어디까지나 무대 밖의 조연”
수학 빠진 물리학은 스토리일 뿐
물리학 박사가 선택한 ‘현상 유지’의 길
교양서는 과학의 저변 넓히는 크로키
AI 의존 높아져 번역 완성도 저하 우려
과학으로 앞서 나가는 나라가 되려면
일반인들 과학에 긍정적 마음 가져야

지난 6일 경기 산본 자택에서 박 번역가를 만났다. 그는 ‘과학도서’ 번역에 매진하기까지 우연과 필연이 씨줄과 날실처럼 교차한 순간들을 돌아봤다. ‘과학’ 하면 떠오르는 강렬하고도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1969년 7월, 미국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정부에서 월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고 TV 중계를 했다. 서울 약수동 달동네 사람들이 유일하게 TV가 있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아버지가 천문학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저한테 달 착륙을 꼭 보여주시려 TV 있는 집으로 데려갔어요. 동네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들어, 들어갈 틈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나뭇가지를 가져오시더라고요. 땅에 그려가며 아폴로 11호 발사부터 귀환까지 설명해 주셨어요. ‘와 신기하다’하며 듣는데, 뒤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요. 돌아보니 다들 TV는 안 보고 우리 주위에 모여 있더라고요.”
동네에서는 그의 집을 두고 똑똑하다는 뜻을 섞어 ‘청와대집’이라고 불렀다. 동네 어르신들 기대에 부응해 “꽤 열심히 공부했다”는 그는 1983년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핵물리학 석사를 거쳐 199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이론입자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수학책 한 권을 발견해서, 출판사에 먼저 번역을 건의했어요. 안 팔릴 거라며 거절하더라고요. ‘정말 좋은 책이다, 이게 안 팔린다면 우리나라 과학은 미래가 없는 거다’라고 약간 과장을 섞어 밀어붙였죠. 그래서 나온 책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사이먼 싱 지음)예요.”
1998년 출간된 이 책은 예상과 달리 흥행에 성공했다. 다른 출판사들에서 번역 의뢰가 부쩍 늘기 시작했다. 한 출판사가 ‘페르마의…’ 번역이 좋았다며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엘러건트 유니버스’(브라이언 그린 지음)라는 책을 작업하게 됐다.
“이 책도 반응이 좋았고 지금까지 잘 팔리고 있어요. 이후로 어디 가서 과학자들과 얘기하다 보면 중고등학생 때 이 두 권을 읽고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굉장히 보람을 느끼는 책입니다.”

책임감을 갖고 번역하게 된 이후로 20년 넘게 작업 의뢰가 꾸준히 들어왔다. 그는 “늘 번역할 책이 몇 권씩 밀려 있는 상태였다”며 “지금도 두어권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번역 작업을 하며 뉴턴이라는 미로에 들어가 헤맬 수 있었다”며 “뉴턴의 치밀한 사고를, 그것도 17세기식 어법으로 따라가느라 2년 동안 거의 고문이었다”고 했다. 큰 산을 넘은 소감에 대해선 “한 번 뉴턴의 머릿속이라는 미로를 겪어봤다는 점, 그 극한의 논리를 따라가 봤다는 점만으로 만족스럽다”면서도 “누가 이 책을 시간 내서 읽는다면 말리고 싶다”반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청소년 대상 강연도 다니는 그는 학생들이 이 책에 사인을 받아갈 때면 ‘대학 가기 전까지 이 책 읽지 마라’고 경고한다고 한다.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뉴턴이 일부러 책을 어렵게 썼다”며 “시시껄렁한 학자들이 시비 걸고 논쟁하는 게 싫으니 핵심만 추려서 물리학의 미니멀리즘이랄까, 진짜 간결하게 써놓았다”고 설명했다. 미적분학을 사용해 명제를 증명하지 않고 당대에 통용되는 기하학과 비례식만을 활용한 것도 어려움을 더했다.
그가 그간 작업물 중 아끼는 또 다른 책은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다. 20세기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1960년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모아놓은 책이다.

그는 번역하는 틈틈이 각종 취미를 즐기는 ‘취미 부자’다. 집에는 수십년간 쌓인 취미의 흔적이 빼곡하다. 일단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라모델을 조립했다. “프라모델은 수명이 있다 보니 10년이 지나면 버리는데, 신경 써서 관리해서 45년쯤 된 프라모델도 갖고 있다”고 한다.
레고 조립도 인생의 동반자 격인 취미다. 박 번역가는 “전 레고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얼리어답터”라며 “고모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간간이 보내줘서 1960년대부터 갖고 놀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뚱땅거린 기타와 피아노, 대학 입학 후 시작한 당구도 여전히 즐긴다. 그는 “당구로는 아마추어 중에 최고”라고 자부했다.

최근 늘어난 인공지능(AI) 번역도 골칫거리다. 그는 “출판사들이 점점 AI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며 “그렇지 않아도 과학적 논리를 일상 언어로 풀어쓰는 게 어려운데 번역 완성도가 AI 때문에 더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1960년 서울 출생 ●1983년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 ●199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사 학위(이론입자물리학) ●경원대(현 가천대)·한성대·서강대 시간강사 ●경희대·대진대 초빙교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엘러건트 유니버스’ ‘평행우주’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리만 가설’ ‘프린키피아’ 등 130여권 번역 ●2005년 한국출판문화상, 2016년 번역 분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상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학센터(APCTP) 주관 우수과학도서 7회 선정
군포=송은아 선임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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