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조의 만사소통] 책과의 대화

관리자 2026. 3. 1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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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 벗어나
책장 쉽게 넘겨야 이해도 쏙쏙
서재에 꽂힌 장식용 책 속에도
소중한 ‘추억거리’ 온전히 담겨
기억과 시간 또렷하게 새겨져
추억 매개체로 소장가치 충분

“좀 버려요. 웬만하면 다 버려요.” 아내가 책을 버리란다. 집 리모델링 공사를 해야 하는데 이삿짐 창고에 보관하기 부담스럽다고 했다. 게다가 직업이 교수다보니 책이 많다. 아내 눈에는 충분히 버릴 게 많다는 거다. 다 읽었으니까 버려야 하고, 또 안 읽을 거니까 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웬만하면 다 버려?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친김에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책이란 1.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읽어도 내용을 금방 까먹어요.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고.” 옆집에 사는 처형의 말이다. 50대 후반이라 기억력 감퇴와 노안 때문에 책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책은 다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또 반드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책을 대할 때 이런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읽기만 하면 안될까? 읽는 행위 자체를 즐기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경험상 책에서 무언가를 꼭 얻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보다, 가볍게 읽어보겠다고 생각할 때 훨씬 더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집착하면 도망가고, 툭 놓아버리면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있더라는 것이다.

책이란 2.

서재에는 많은 책이 꽂혀 있다. 읽은 책도 있고 읽지 못한 책도 있다. 구입한 것도 있고 선물받은 것도 있다. 서재의 책들은 주로 읽을거리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서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읽을거리’가 아닌 ‘추억거리’로 꽂혀 있는 책도 많다.

먼저 저자로부터 친필 사인과 함께 받은 책은 저자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다. 어디에서 만나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은 꼭 읽지 않아도 그저 책장에 꽂아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훌륭한 존재 이유를 가진다. 책장에 꽂아두고 저자와의 추억을 곱씹는 것도 책과의 좋은 만남이다.

여행을 준비하다가 혹은 여행지에서 책을 사기도 한다. 물론 읽으려고 구매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행 다니는 데 정신이 팔려 책을 전혀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이 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도 책장에 모셔놓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저 책은 지난번 일본 갔을 때 산 책이구나. 저놈은 일본 온천의 따스한 공기를 머금고 있어. 이처럼 ‘추억거리’로 생각하면 된다. 한장의 사진처럼 한자락의 추억을 간직한 책, 이 얼마나 훌륭한 책의 기능인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런 예는 차고 넘친다. 학교 다닐 때 봤던 교과서에는 개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 교과서에 줄 쳐진 암기의 흔적들, 잘 풀리지 않은 수학 문제에 신경질을 담아둔 낙서들, 영어책에 그려진 발음기호 등은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들로 아로새겨져 있다. 왜 책을 버려야 할까? 이처럼 소중한 존재인 책을 고이 모셔야 하지 않을까?

책이란 3.

수업 중이다.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책을 깨끗하게, 그리고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업 중에 사귀고 있는 사람이 생각나면 그 아이 이름을 쓰면서 낙서도 하고 짧은 상념들도 막 쓰세요. 컵라면 뚜껑으로도 쓰고 캠퍼스 잔디밭에서 엉덩이 깔판으로도 사용하세요. 책에다가 자신의 추억을 새긴 다음 버리지 말고 시집·장가 가더라도 꼭 간직해봐요. 10년·20년 후에 보면 지금 이 시간이 또렷이 떠오르며 여러분의 역사가 될 테니까.”

아내여. 이렇게 소중한 책을 어떻게 버리냐고오오오….

김혁조 강원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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