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스며든 격변의 공기… 대극장 체호프 연극에 별들 쏟아진다
체호프 作 잇따라 대극장 무대에

한국 연극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대문호’ 안톤 체호프(1860~1904)는 신기한 존재다. 그의 희곡은 사회, 정치, 철학, 경제적 격변이 시작되던 19세기 제정 러시아 말기의 이야기. 이 아득한 시공간의 거리에 아랑곳없이, 한국에선 “연극하는 사람들에게 체호프는 성지(聖地)와도 같다”(극작·연출가 김명화)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체호프의 4대 장막극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은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자주 공연된다. 올해는 특히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는 체호프 작품이 잇따라 1000석 넘는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한국 연극은 왜 지금 다시 체호프를 소환하는 걸까.
◇이서진·고아성·심은경 ‘바냐 아저씨’
체호프의 대표작 중 ‘바냐 아저씨’를 각색한 연극 두 편이 먼저 찾아온다. 평생 집안 소유의 숲을 가꾸며 일만 하며 살았던 ‘바냐’는 예술대학 교수인 매형의 성공만을 바라며 뒷바라지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믿어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5월 7~31일 공연하는 LG아트센터 ‘바냐 삼촌’(각색·연출 손상규)엔 배우 이서진이 ‘바냐’를, 고아성이 ‘소냐’를 연기한다. 모두 첫 연극 무대 데뷔다. 5월 22~3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국립극단 ‘반야 아재’(번안·연출 조광화)엔 한국 배우 최초로 일본 키네마 준보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심은경이 데뷔 후 첫 한국 연극 무대에 오른다. ‘바냐 아저씨’를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심은경은 극 중 ‘박이보’(원작의 ‘바냐’)의 조카 ‘서은희’(원작의 ‘소냐’) 역을 맡았다. 지난해 5월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각각 이혜영과 이영애 배우 주연으로 대극장 무대에 올렸던 국립극단과 LG아트센터가 이번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로 다시 만나게 된 것도 흥미로운 우연이다.

국립극단 ‘반야 아재’의 조광화 연출은 “우리의 불안이 체호프 시대의 불안과 맞닿아 있지 않나 싶다”고 했다. “AI가 인간 일자리를 빼앗는 지금처럼, 체호프의 연극엔 시대의 변화 속에 이전의 지위와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영웅이 사라지고 다들 각자도생하기 바쁜 시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격동이 우리 삶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하죠. 체호프의 인물들은 어쩌면 그런 무력감, 불안감, 당혹감의 결정체 같습니다.”
LG아트센터 ‘바냐 삼촌’으로 처음 대극장 연극 연출을 맡은 손상규 배우는 “서로의 결핍을 비난하기보다, 서로를 마주하기 위해 모두가 얼마나 서툴게 노력하고 있는지가 이 무대에서 보였으면 한다. 그것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실제 우리가 사는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회엔 나를 짓누르는 다양한 강박이 존재하고, 세상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변하는 건 아닐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삶은 나무 속 나이테 모양처럼, 각각 있는 그대로 괜찮은 것 아닐까요. ‘바냐 삼촌’은 그런 생각을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전미도, ‘갈매기’로 연극 무대 귀향
8월 9~31일엔 극단 맨시어터가 NHN링크와 함께 ‘갈매기’를 객석 수 1010석의 서울 광진구 ‘티켓링크1975씨어터’에서 공연한다. 호수가 있는 러시아의 아름다운 전원 마을을 배경으로, 덧없는 예술과 사랑을 좇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박제된 갈매기의 은유를 관통하며 펼쳐진다. 5시간 넘는 그리스 비극 ‘이 불안한 집’과 창극 ‘보허자’ 등을 만든 젊은 연출가 김정이 연출하고, ‘왕사남’으로 천만 배우가 된 전미도가 배우의 꿈을 좇다 영락하는 여인 ‘니나’를 맡았다. 전미도는 ‘오슬로’(2018) 이후 8년 만의 연극 무대 귀향이다.
주목받는 젊은 연출들도 체호프를 다시 읽어내고 있다. 지난달엔 서울 한남동 더줌 아트센터에서 김연민 연출이 되살아난 체호프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뼈대로 ‘줌 인 체홉’을 공연했고, 강훈구 연출의 극단 ‘공놀이 클럽’도 올해 내내 체호프 4대 장막 희곡을 잇따라 낭독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다.
김정 연출은 “많이 지친 시기에 다시 체호프를 보게 됐는데 그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나 같았다. 대단할 것 없는 삶, 지친 삶들, 때가 탄 욕망들이 새롭게 보였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고통스럽고, 갈망하고 좌절하고 다시 또 사랑합니다. 내 삶이 별 볼일 없게 느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그런 삶에도 빛나는 순간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같은 값의 좌절과 고통이 존재한다고 체호프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극평론가 숙명여대 이진아 교수는 “90년대 해체와 실험적 재해석의 붐, 2010년대의 전통적 사실주의 접근에 이어 최근 우리 연극은 ‘무엇이 체호프적인가’를 다시 탐구하기 시작한 것 같다”며 “이상을 좇는 것과 일상을 산다는 것의 사이엔 심연 같은 구덩이가 있고,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 그 간극을 격렬하게 체감한다. 바로 그때 떠오르는 작가가 체호프일 것”이라고 했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지만, 그 바깥에 소용돌이치는 격변의 공기를 마시고 있어요. 지금 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다저스 김혜성, 시범경기 타율 0.407에도 마이너리그행
- ‘1874 파리의 밤’ 서울서 되살아나다... 인상주의 탄생 VR 체험
- 강남구, 올해 교육비 357억원 편성... 미래인재 양성에 ‘온힘’
- 성동구, 합계출산율 0.8명으로 ‘서울 1위’
- 폐기물장에서 핫플로... 서대문구 ‘카페폭포’ 375만명 방문
- 마포구 ‘생활폐기물 다이어트’... 혼하 배출 30% 감축 목표
- 강동문화재단, 배리어 프리 연극 ‘해리엇’ 무대 선보여
- 노원구, 중증장애인 차량에 리프트 등 보조기기 지원 확대
- 지하철 5호선 연장 예타 통과... 강서구, 건폐장 이전 앞당겨
- “일하고 싶은 중장년이라면”...강북구, 자격시험 응시료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