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창업땐 생존율 두배 높아 … '연쇄창업 신화' 제2의 장병규 키워라
재창업기업 5년 생존율 83%
첫 창업기업보다 2배 높아
자본·회수시장 역할도 중요
세컨더리 펀드·M&A 활성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육류 숙성 예측 기술을 보유한 김철범 딥플랜트 대표. 김 대표는 이 회사를 2019년 창업했지만, 그의 첫 창업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디지털 카메라 방수 케이스 제작을 시작으로 수중 특수 장비업, 전자책 콘텐츠 기업 등 무려 12번의 창업 끝에 찾은 아이템이 '딥에이징'이다. 딥플랜트는 AI로 육류 내 단백질·지방·수분 등을 파악한 후 가장 적합한 숙성 조건을 도출해낸다. 이 기술로 지난해 10월 싱가포르 벤처캐피털(VC)에서 프리 시리즈A 투자도 유치했다.
김 대표처럼 여러 번 연달아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은 연쇄창업가로 불린다. 이들은 이전 창업에서 얻은 경험을 자산으로 다음 창업의 성공 확률을 높이고, 투자금을 회수한 이후 다른 벤처회사의 초기 투자에 참여해 선순환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창업에서도 경력이 중요하다. 한 번 사업에 실패한 후 폐업·재기에 도움을 받은 창업자의 성공 확률은 크게 올라간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이 발표한 '2023년 재창업 기업 실태조사'에서 '재도전성공패키지' 등 재창업 지원 사업에 참여했던 기업은 5년 생존율이 83.5%를 기록했다. 일반 창업 기업의 5년 생존율(33.9%)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높다. 초반부터 '돈 되는 사업'을 고민하기 때문에 성과도 빠르게 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재창업 비중이 29%에 그친다. 창업자들이 2회 이상 창업에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이한주 베스핀글로벌 대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 이승건 토스 대표 등이 몇 안 되는 성공적인 연쇄창업가로 꼽힌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2010년대 창업에 뛰어든 30·40대 젊은 창업가들이 연쇄창업을 통해 의미 있는 성장을 만들어가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중고 의류·잡화를 판매하는 패션 리커머스 서비스 '차란'을 운영하는 마인이스의 김혜성 대표는 미국 시카고대 재학 시절 룸메이트와 '프린터스'를 창업했다. 학생들에게 수업 자료를 공짜로 프린트해주는 대신 프린트물에 동네 상점이나 은행 광고를 실어 광고비를 받는 사업이었다. 300만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주요 외신에 소개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전자책과 온라인 광고의 등장으로 성장동력을 잃었다. 이후 VC 업계를 거친 그가 두 번째 창업한 회사가 마인이스다. 대표 서비스 차란은 벤처 투자 혹한기에도 누적 328억원의 투자를 유치해 꾸준히 성장했고, 2023년 8월 론칭 이후 2년5개월 만에 누적 가입자 125만명을 확보했다.
올인원 AI 메신저 '채널톡'을 운영하는 채널코퍼레이션의 김재홍 공동창업자(부대표) 역시 창업에 준하는 3번의 피벗을 거쳐 채널톡을 만든 케이스다. 최시원·김재홍 대표의 첫 광고 사업인 '애드바이미'와 가상화폐 기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쿠키'는 모두 고객을 찾지 못해 실패했고, 세 번째로 시도한 오프라인 매장 방문객 분석 서비스 '워크인사이트'가 3년간 2000여 개 매장에 설치되면서 성장 가능성이 생겼다. 채널코퍼레이션은 네 번째 서비스 채널톡을 출시해 현재 22개국에서 2024년 기준 매출 245억원을 달성했다.
국내 1위 전자계약·서명 서비스 플랫폼인 모두싸인의 이영준 대표는 부산대 재학 시절 변호사와 의뢰인을 이어주는 법률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앱) '인투로'를 만들었지만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앱 관련 서비스로 만든 '계약서 서식'을 찾는 고객은 의외로 꾸준했다. 이 대표는 고심 끝에 기존 서비스를 모두 중단하고 전자계약·서명 서비스를 출시했다. 모두싸인의 기업·기관 회원은 33만곳, 누적 이용자는 1000만명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생활·금융 플랫폼 '글로우'를 운영하는 클링커즈의 서성권 대표는 2022년 '코드에프'라는 데이터 중개 플랫폼 기업을 창업한 지 8년 만에 매각하고, 이듬해 두 번째 회사인 클링커즈를 설립했다. 베테랑 팀원 10여 명이 재창업에 의기투합하며 시장이 커질 만한 서비스에 집중했다. 클링커즈는 서울핀테크랩 입주 기업으로 선정됐고, 향후 서비스를 위해 대출모집법인 2곳을 연달아 인수했다.
연쇄창업자들은 창업 과정에서 겪는 실패가 다음 창업으로 이어지는 자산이었다면서도 재도전에 나설 수 있는 정책적 기반 역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혜성 대표는 "직접 해보면서 실패를 자산으로 얻게 된 사람들이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도 재도전 전용 펀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2월 '재도전 응원본부'를 출범시키면서 재창업 시 활용 가능한 재도전 기업 대상 펀드 조성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도 2030년까지 재도전 기업 대상 펀드와 신설하는 재도전 특례보증을 통해 '1조원+α'의 재도전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설명했다. 3월 17일자 A12면 보도
전문가들은 창업자들이 회사를 쉽게 매각할 수 있도록 인수·합병(M&A) 시장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2023년 한국무역협회가 낸 '스케일업을 위한 스타트업 생태계 국제비교'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상장을 통한 엑시트 비중(25%)이 M&A(0.7%)보다 현저히 높았다. 해외에서는 M&A를 통한 투자금 회수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데 반해 국내에서는 M&A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구조다.
세컨더리 펀드 활성화 필요성도 제기된다. VC가 스타트업에 5~10년간 직접 투자한 후 상장이나 매각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일반 벤처펀드와 달리 세컨더리 펀드는 VC나 기존 투자자 지분을 대신 매입해 투자금을 조기 회수한다. 벤처 업계 관계자는 "현재 국내 세컨더리 펀드 시장은 정보 비대칭과 거래 제한 등으로 민간 자본 참여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연쇄창업을 늘리려면 창업 7년 이내 기업에 지원을 집중하는 정책 구조를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과거 고등학생 창업가로 출발해 현재 종합 이벤트 비즈니스 플랫폼 온오프믹스를 이끌고 있는 양준철 대표는 "창업 7년 이내 기업에 지원이 집중되는 구조에서는 단기 성과만 노리는 스타트업이 늘어난다"며 "7년 이후라도 성장 단계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유진 기자 / 양세호 기자 / 이윤식 기자 / 사진 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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