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한 나를 안아주자 온전히 홀로 설 수 있어야 둘도 될 수 있으니 [이은혜의 심리 테라피]
며칠 전 대체 공휴일을 이용해 고향에 내려온 옛 제자가 찾아왔다. 각박한 서울 생활이 힘들었을까? 소녀처럼 깔깔대기 좋아하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늙은 할머니처럼 보여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아직 좋은 사람 없어?" 올해 막 사십 대에 들어선 그녀는 인간관계에 약간 지친 듯했고 그 무엇에도 시들해 보였다. "누군가를 찾으려 애쓰고 그 사람과 맞추려 하는 거 이제 더는 못 하겠어요. 남자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래야 더 완전해 보이는 것 아닐까? 어릴 때는 그런 생각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혼자가 더 좋아요. 좋은 남자를 기다리다 결국 또 실망하는 것보다 혼자 완전 하려 애쓰는 게 훨씬 쉽고 효율적이잖아요? 남자 만나며 연애 비용에 쓰는 돈도 나에게 다 몰방할 수 있고요."
두 번의 찐한 연애와 몇 번의 실연 끝에 실용주의자가 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왠지 맞는 얘기 같아 솔깃했다. 한편으론 맥없이 쓸쓸한 그림자의 독백 같아 마음 한구석이 시리기도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인 사람이 즐비하고 일인 가구의 수도 40%에 육박한다. 이제 곧 우리나라 17개 시도에서 1인 가구가 가장 주된 가구 형태가 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받는 상처는 덜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외로움을 감내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차원이라 고집하며 외로움 대신 고독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어쨌든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감정임에도 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둘보다는 혼자이기를 선택하는 것일까? 사회적 환경이나 현실적 조건을 떠나 오직 심리적인 조건만을 생각한다면 상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노먼 엡스턴은 사랑을 잃은 사람과 사랑을 선택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책 에서 '과도한 기대'가 사랑을 망치는 이유라 한다. 누구나 사랑의 완전함을 기대하고 환상을 꿈꾼다는 것이다. 사랑할 때 일어나는 몇 가지 주요 현상이 있다. 첫째, 사람은 '너'도 '나'도 결함투성이며, 관계란 이렇게 결함 많은 사람 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임을 망각해 버리는 것이다. 세상 모든 영화 속 연인이 그렇듯 사랑이란 한눈에 반한 사람들이 벌이는 로맨틱한 사건이자, 눈빛만 보고도 서로 마음을 감지하는 환상적인 사건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맹목적 속성이다. 둘째, 이처럼 사랑에 대한 기대, 사랑의 대상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있을 때 실망이 따라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랑할 때의 연인은 '사랑이 어떻게 그래?'라는 놀란 얼굴로 여전히 기대에 찬 눈망울을 말똥거린다.
며칠 전 그렇게 말똥거리는 눈동자를 만났다. 30대 초반의 여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 바람이다. 닭똥 같은 눈물이란 말이 실감이 날만큼 그녀의 큰 눈망울에선 굵은 눈물이 연방 빗물처럼 쏟아졌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녀는 이별을 말했다. 자신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남자가 헤어지자고 했단다. 1년을 함께 지냈는 데 혼자 있게 되니 너무 외롭고 도저히 혼자 지낼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녀. 오빠가 아른거려 일도 할 수 없다고. 처음 연애할 땐 열정이 뜨거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편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이별하고 나니 자신이 남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진단다. 내담자의 눈물이 잠잠해 질쯤 헤어진 이유를 물었다. 바람은 아니지만 자신이 다른 남자친구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만나면 술 한잔하고 이야기도 잘 통하고, 믿음직한 오빠한테선 느낄 수 없는 발랄한 즐거움이 있었다고. 오빠라는 그에게는 말하지 못했는데 오빠가 알게 되었다고.
그녀의 딱한 사정과 아쉬운 감정에 나도 동화가 되었다. 그래, 그저 즐거웠을 뿐인데 이해 좀 해주지. 내 마음도 그녀처럼 야속했지만, 질투는 나의 힘! 질투가 없으면 사랑도 아니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그 오빠의 심란한 마음도 걱정되었다.
소나기 같은 눈물을 쏟아내던 30대의 그녀처럼 진정한 사랑은 열정이 식은 후에야 온다. 열정이 식고서야 사랑은 기대와 뜨거움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내 사랑의 결핍된 부분에 집착하면서 여전히 완전한 환상을 꿈꾸는 동안에는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상담자는 사랑을 갈구하며 찾을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가며 만들어 가는 사랑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사랑의 전제는 온전한 '홀로서기'라고. 혼자로서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둘이 되었을 때 두 배로 만족스럽지 못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쪽이 기울면 다른 한쪽도 무너진다. 사랑의 관계는 함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가는 끝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상실로 균형을 잃은 그녀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답을 모르는 상담자는 책에서 주워들은 대로 말해주었다.
"사랑에 진심이었다면, 짙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 해요. 자신이 겪은 이별의 과정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이해하며 치유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지요. 가장 이상적인 치유 방법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서로 공감하고 위로받는 거죠. 어떤 경우에는 관계가 끝나고 나서야 자신을 지지해 주던 사람이 진정 자신을 공감해 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도 해요. 가족이 도움되기도 하지만 때론 마음의 상처를 덧내기도 하지요. 애정이란 이름으로 질책하거나 자신의 철학을 강요하기 쉬우니까요. 가족이 양날의 칼처럼 마음을 다치게 한다면 잠시 거리를 두고 친구와 아픔을 달래는 것이 좋겠죠.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이에요."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또 소나기가 쏟아졌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는 자기연민을 가진 사람이 스트레스에 더 건강한 생리적 반응을 보인다고 보고한다. 이별의 충격도 더 잘 견디고 우울감이나 불안감, 스트레스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더 낮다는 것이다.
나 역시 자기연민을 지닌 사람만이 자신을 수용하는 내적 힘이 있다고 늘 강조해 왔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는 이와 같은 자기연민의 세 가지 요소를 자기 친절, 인정, 마음 챙김이라 요약한다. 자기 친절이란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격려해 주는 것. 이별의 결과를 나의 잘못으로만 가져올 때 자신에게 친절할 수는 없다. 자신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위로하며 따듯하게 대하는 자기 돌봄은 아픔을 치유하는 상비약이다. 자기연민의 두 번째 요소는 인정이다.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나도 잘못하고 실수하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할 때 일어나는 문제들, 사랑에서 발생하는 잘못들, 이별하게 하는 자잘하거나 치명적인 문제 또한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누구나 겪는 것이기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자기연민의 세 번째 카드는 마음 챙김이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게 된다. 마음을 돌아보고 챙김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다. 마음챙김이란 현재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 신체 감각들을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며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내 존재를 살뜰히 느끼고, 내 감정이 어디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주시하는 마음 챙김은 자중자애와 자기연민으로 이어진다. 이별했다고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거나 실패자로 낙인찍지 마라. 다만, 영원할 것 같은 사랑에 잠시 마음을 다쳤을 뿐. 우리는 사랑을 잃고서야 비로소 버려야 할 것과 챙겨야 할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은혜 이은심리상담센터 소장
☞필자 소개 상담을 업으로 밥을 먹습니다. 인문학 공간 이은문화살롱을 운영하며 밥을 까먹지만, 마담 역할이 좋아 종종 즐거운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