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암 요새가 품은 신비의 땅… “수고했다, 내 인생” [서병철의 은퇴후 잘 사는 법]

퇴직을 앞둔 중장년의 앞에는 대개 세 갈래 길이 놓인다. 수십 년간 전력 질주해 온 자신에게 온전한 휴식을 선물하는 안식의 길, 생계나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익숙한 일터로 향하는 재취업의 길, 그리고 그동안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탐색의 길이다. 그중 세 번째 길을 선택한 이들에게 여행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몸담았던 조직의 직함을 떼고, 오직 '나'라는 본연의 콘텐츠가 낯선 세상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시험해 보는 살아있는 임상 현장이다.
우리는 평생 '어딘가의 누구'로 불려 왔다. 하지만 명함이 사라진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주어와 마주한다. 이번 여정의 좌표는 전북 익산, 그중에서도 거대한 화강암 요새가 품은 신비로운 땅 '황등'으로 향한다. 이곳은 단단한 돌의 도시이자, 그 돌을 깎아 삶을 지탱해온 사람들의 뜨거운 서사가 흐르는 곳이다.
거대한 설치 미술이 된 지하 요새, 황등석산의 위용

익산 황등면에는 여타 산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풍경이 숨어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구릉지 같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발밑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숨이 멎는다. 산이 위로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 아래로 수십 미터를 파고 내려간 기이한 구조의 ‘황등석산’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근현대 건축의 뼈대를 지탱해 온 화강암의 본산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와대 영빈관의 기품 있는 돌기둥과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육중한 석재들이 모두 이곳 황등의 품에서 태어났다.
수직으로 깎여 내려간 백색 절벽을 내려다보면 압도적인 경외감이 밀려온다. 거대한 화강암 벽면에 새겨진 직선과 면의 흔적들은 마치 추상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이나 초대형 설치 미술을 연상시킨다. 이는 인간의 세밀한 기획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수십 년간 돌을 깨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온 석공들의 치열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우연의 예술'이다.
거친 기계톱이 지나간 자리는 선명한 수직의 선으로 남았고, 물길이 흐른 자리는 수묵화 같은 자연스러운 농담을 만들어냈다. 은퇴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있다면, 이 단단하고 서늘한 화강암 벽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길 권한다. 수만 년의 세월을 견디며 제 자리를 지킨 돌들이,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시작하려는 당신의 인생을 다시금 단단하게 잡아줄 묵직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석공의 허기를 달래던 소울푸드, 황등 비빔밥

공간의 시각적 깊이를 충분히 이해했다면, 그다음은 그 공간의 서사가 눅진하게 담긴 음식을 만날 차례다. 황등 비빔밥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인근 전주비빔밥과는 근본부터 결이 다르다. 과거 거친 채석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석공들은 비빔밥을 비빌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고단했다. 그들의 허기를 단 1분이라도 빨리 달래주기 위해 주방에서 미리 밥과 비법 양념을 쓱쓱 비벼 내놓기 시작한 것이 황등 비빔밥의 시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맑은 선짓국 한 그릇과 함께 나오는 투박한 육회 비빔밥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거친 돌 가루를 마시며 일하던 아버지들의 짠한 삶이 녹아있다. 주방장의 손맛으로 미리 비벼져 나오는 밥알은 양념이 속까지 균일하게 배어 있어 씹을수록 깊은 감칠맛을 낸다. 세련된 인테리어나 화려한 반찬은 없어도, 그 한 그릇에는 노동의 숭고함과 생존의 치열함이 공존한다. 웰니스가 별건가. 내 삶의 뿌리를 기억하고, 지나온 수고로움을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위로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미식의 완성이자 치유의 과정이다. 밥상 위에 놓인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시대를 버텨온 이름 없는 영웅들의 훈장과도 같다.
인연의 온기가 가르쳐준 진짜 자산

이번 익산 여정에서 필자가 마주한 가장 눈부신 풍경은 단단한 돌도, 맛있는 밥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그러나 운명처럼 이어진 다정한 인연들이었다. 과거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먼 길을 달려와 맛집을 안내하고 관광지를 동행해 준 지인들의 모습에서 필자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는 평생을 '경제적 자산'의 증식과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최우선 순위에 두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부동산 가격의 등락에 가슴을 졸이고, 주식 시장의 파고에 일희일비하며 식탁의 대화를 온통 숫자와 수익률로 채워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은퇴는 그 강박적인 우선순위를 강제로 재조정하게 만드는 생의 거대한 쉼표다. 통장의 잔고보다 중요한 것은 내 곁에 남은 사람의 온도이며, 직함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되느냐는 사실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뒤로 노을이 지는 광경을 보며 자문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진심 어린 따뜻함을 전한 적이 있었던가?" 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기 때문이다. 은퇴 후의 삶은 과거의 과오를 자책하는 시간이 아니라, 비어버린 우선순위 목록을 다시금 소중한 가치들로 채워가는 미세 조정의 시간이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서 다르게 살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번 익산 여정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묵직한 숙제를 남겼다.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하기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내가 가진 경험의 온기를 타인과 나누는 즐거움. 인생 2막의 행복은 거창한 성취나 거대한 부가 아니라, 이런 소소한 깨달음과 다정한 연결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황등의 돌들이 일깨워주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 걷고, 그 지역의 역사가 담긴 음식을 나누며, 세상의 숨은 이면을 발견하는 일. 이 즐겁고 의미 있는 '탐색의 여행'이야말로 은퇴라는 낯선 간이역에서 우리가 찍어야 할 가장 확실한 첫 번째 좌표다. 비록 그 실천의 과정이 황등 화강암을 깨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겠지만, 그 단단한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다면 우리의 인생 2막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백색의 절경이 되지 않을까.
이제 지도를 덮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간다. 명함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의 보폭은 그 어느 때보다 넓고 단단해졌다. 황등의 화강암이 그러하듯, 우리네 인생도 깎이고 다듬어질수록 비로소 제 고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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