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의 재판장에 선 젠지세대 ‘홍련’, 강렬한 록 사운드로 묵은 한을 씻어내다

노정연 기자 2026. 3. 17.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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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홍련’ 공연 장면. 마틴 엔터테인먼트 제공

죽은 영혼들이 심판을 받는 저승의 재판장 천도정. 이곳에 한 소녀의 혼백, 홍련이 끌려온다. 죄목은 아버지 배무룡을 살해하고 남동생 장쇠를 해친 혐의. 홍련은 자신이 분명 아버지를 죽였다며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주장하지만 사건의 기억은 군데군데 비어 있다. 무엇을 잊고 있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 채 소멸을 기다리는 영혼. 천도정의 주인이자 길 잃은 혼령을 이끄는 저승신 바리가 무대에 오르고, 홍련의 한을 풀기 위한 13만 9998번째 재판이 시작된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홍련>은 한국 전통 설화 <장화홍련전>과 <바리데기>를 재해석한 창작 뮤지컬이다. 2024년 초연 당시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했을 정도로 탄탄한 팬층을 확보했고 제9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중국 상하이와 광저우 등 해외 무대를 거쳐 다시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뮤지컬 ‘홍련’ 공연 장면. 마틴 엔터테인먼트 제공

작품은 전래동화 속 교훈과 가르침을 비껴가는 대신, 홍련과 바리를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동시대적인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계모의 흉계에 빠져 목숨을 잃은 가련한 소녀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는, 버려진 공주에서 저승의 신이 된 ‘효의 상징’ 바리의 서사와 만나 현대적인 복수극이자 치유극으로 탈바꿈한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인 채 재판장에 선 홍련은 우리가 알고 있던 ‘비운의 소녀’와는 거리가 멀다. 무릎길이의 갈래치마 아래 알록달록한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난 그는 ‘젠지(Gen-Z) 세대’다운 면모를 뽐낸다. 속사포 같은 랩을 내뱉으며 거침없이 무대를 휘젓는 그는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을 뿐”이라며 자신을 심판하는 신의 권위를 비웃을 정도다. “내가 죽였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홍련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분노와 슬픔의 실체를 궁금케 한다.

뮤지컬 ‘홍련’ 공연 장면. 마틴 엔터테인먼트 제공

바리 역시 단순한 심판자가 아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홍련의 깨진 기억 조각을 맞추며 애써 외면해온 고통의 근원과 마주하게 한다. 바리는 홍련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죄책감을 씻고 스스로를 용서하도록 이끈다. 수십만번의 지난한 물음 끝에 마침내 홍련이 자신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재판장이었던 무대는 한 많은 영혼을 정화하는 씻김굿의 현장이 된다.

작품의 백미는 록 비트와 국악기 선율이 휘몰아치는 넘버들이다. 홍련을 절규, 바리와 차사들의 질문 공세는 날카로운 기타 리프에 실려 관객의 심장을 때린다. 작은 무대를 채우는 강렬한 조명과 무대 연출은 천도정이라는 초현실적인 공간과 홍련의 파편화된 기억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뮤지컬 ‘홍련’ 공연 장면. 마틴 엔터테인먼트 제공

무엇보다 가정 학대 피해자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신파나 미화로 흐르지 않고, 인물들의 억눌린 감정을 차근차근 끌어올린다는 점이 돋보인다. 스스로를 옭아맨 상처를 직면하고 아픔을 씻어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감정의 파고를 지나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에 도달하게 된다.

이번 투어에는 ‘홍련’ 역의 이지혜, 강혜인, 김이후, 홍나현, ‘바리’ 역의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 ‘강림’ 역의 이정수, 신창주, 이종영, ‘월직차사’ 역의 김대현, 백종민, ‘일직차사’ 역의 신윤철, 정백선까지 초연 무대를 빛낸 배우들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공연은 5월17일까지 충무아트센트 중극장 블랙에서 이어진다.

뮤지컬 ‘홍련’ 공연 장면. 마틴 엔터테인먼트 제공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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