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목숨과 바꾼 금기어 ‘양위’

권력의 정점에 선 군주와 그 주변을 둘러싼 측근들의 관계는 시대와 체제를 막론하고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권력은 나눌 수 없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형제 사이에서도, 부자 사이에서도 권력은 쉽게 공유되지 않는다. 정치사에서 반복되는 갈등과 비극의 상당수는 이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1466년 음력 6월 12일, 한양 도성문 밖에서 한 공신이 참수됐다. 주인공은 세조의 정난공신 2등이었던 양정이다. 불과 나흘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안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공로로 왕의 위로를 받던 인물이었다. 세조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연회를 열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려 했다. 그러나 그 연회는 곧 정치사의 비극적인 장면으로 바뀌었다.
사건의 발단은 술자리였다. 술기운이 오른 양정은 갑자기 세조 앞에 무릎을 꿇고 "전하께서 오래 왕위를 지키셨으니 이제 세자에게 물려주고 편히 지내셔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선위' 또는 '양위'를 공개적으로 권한 셈이다.
연회 자리에 있던 신숙주, 한명회 등 대신들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양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근무지였던 곳의 민심까지 언급하며 거듭 양위를 촉구했다. 격노한 세조는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 옥새를 가져오라"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양위'라는 말은 그 자체로 역린을 건드리는 금기어였다. 결국 양정은 왕위를 함부로 거론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도성에 돌아온 지 나흘 만에 처형됐다. 왕에게 충언을 했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권력의 세계에서는 충언과 도전의 경계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신하가 군주에게 양위를 언급한 기록은 한 손의 손가락 수를 넘지 못한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첫 사례는 1406년 태종 때였다. 태종은 왕권을 공고히 하고 신하들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세자 이제에게 왕위를 넘길 뜻을 공개적으로 내비쳤다. 이때 대신 하륜은 겉으로는 전위를 따르는 듯하면서도 "선위를 하신다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절차를 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실제 양위 의도가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행정 절차를 앞세워 상황을 정리하려는 정치적 대응이었다. 결국 선위 논의는 신하들의 만류 속에 철회됐다. 태종은 이를 계기로 외척 세력을 정리하는 명분을 마련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였다.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북상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란했다.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망명하는 방안까지 검토됐지만 신하들은 종묘사직을 버리는 일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신이 "차라리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떠나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도 임금에게 양위를 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제안 역시 실행되지 않았다.
세 번째는 대한제국 말기였다. 1907년 6월 말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황제의 퇴위를 압박했다. 일진회의 송병준과 내부대신 이완용 등은 고종에게 사건을 사과하는 형식으로 정리하고 황위를 순종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고종은 7월 19일 퇴위했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이 세 사례는 성격이 서로 다르다. 태종 때의 선위 논의는 군주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시험에 가까웠다. 반면 선조와 고종의 경우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등장한 논의였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세조 앞에서 직접 양위를 요구한 양정의 발언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장면은 현대 정치사에서도 나타난다. 1973년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과 장교 13명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숙청된 사건이 터졌다. 윤필용 사건이다.
윤필용은 박정희의 오랜 측근이었다. 육사 8기 출신으로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지낸 핵심 인물이었다. 이후 방첩부대장과 베트남 파병 맹호부대장을 거쳐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랐다. 수도경비사령부는 서울과 수도권 방위를 담당하는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나 1972년 한 술자리에서의 발언이 모든 것을 바꿨다. 윤필용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고 후계자는 형님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쿠데타 모의로 조작됐고 결국 그는 숙청됐다. 이 사건은 권력 내부에서 '후계'나 '퇴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박정희는 최측근까지 정리하면서 권력 내부에 2인자를 두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세조 앞에서 양위를 언급했다가 목숨을 잃은 양정에서부터 유신 시기의 윤필용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역사에는 공통된 장면이 반복된다. 권력자의 퇴진이나 후계를 거론하는 순간 그것은 충언이 아니라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권력과 관련된 발언이 정국을 흔드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여권 내부에서는 이른바 '공소취소 거래설'을 둘러싼 공방이 격화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대통령 탄핵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권력을 향한 말 한마디가 언제든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선을 넘었다'는 평가도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권력의 역사에서 금기어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권력 앞에서 어떤 말이 허용되고 어떤 말이 금기인지는 결국 권력자가 어디까지를 도전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작금의 정치 상황 역시 그 오래된 권력의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