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똘 뭉쳐 산불에 맞선 마을 공동체…신안리의 실험

“여럿이 같이 살면 힘들지. 밤에 잠도 잘 못자고. 그런데 그거는 있어. 같이 있으면 안 무서워. 동네 사람들하고 같이 밥 먹고, 종일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니까 위안이 돼.”
경북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에서 44년째 살고 있는 이애자씨(67)는 지난해 겪은 산불로 살던 집이 전소됐다. 지금은 마을 임시주택에 거주하고 있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지난해에는 약 3개월간 마을회관에서 주민 40여명과 함께 공동생활을 했다. 내내 한솥밥을 먹었고, 잠도 한 곳에 모여 잤다. 이씨에게 산불은 여전히 떠올리기조차 힘든 상처로 남았지만, 주민들과 함께 보낸 3개월은 위로가 됐다.
17일 공개된 ‘2025 초대형 영남 산불 피해 실태조사 최종 보고서’를 보면, 피해 주민들이 대피 정보를 얻은 경로는 공식 채널이 아닌 마을 방송과 주민을 통한 전달이 237건으로 재난 문자(112건)를 두 배 이상 앞섰다. 17%는 마을 주민의 차를 이용해 대피했다고 답했다. 마을 공동체가 재난 초기 행정이 채우지 못한 초기 대피 안전망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지난해 3월 대형 산불 직후 영덕군 이재민들은 군 체육관으로 긴급 대피했다. 4월엔 감염병 확산 우려가 커지면서 이재민 분산 조치가 내려졌고, 이재민 대부분은 각 읍내 모텔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신안리의 대응은 달랐다.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버텨보기로 했다. 지품면에서 가장 큰 마을인 신안리에는 160가구가 살고 있는데, 산불로 42가구가 주택 피해를 입었다. 이 중 34가구는 집이 전소됐다.
갈 곳을 잃은 주민 40여명은 임시주택이 마련될 때까지 마을회관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2층 규모 마을회관 건물이 이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부부 가구는 2층 개별 방을 사용하고, 1인 가구는 1층 거실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삼시세끼 식사도 함께했다. 마을회관 주방에서 밥을 짓고, 반찬은 마을 내 식당에서 조달했다. 식재료 비용은 정부·지자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세면과 목욕 등 씻는 문제는 마을 공동 목욕탕을 이용했다. 김인식씨(57)는“주민들이 같이 있으면서 서로 힘이 된 것 같다”며 “주민들이 한 뜻으로 공동생활에 잘 따라줘서 다른 마을보다 수월하게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말했다.
신안리 마을 공동생활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평소 관심을 갖고 쌓아온 마을 기반 시설과 자치 역량이 있었다. 신안리는 2015년 행복마을만들기 사업과 2017년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에 공모해 선정됐고, 두 사업을 통해 공동 목욕탕과 다목적 센터, 2층 규모 마을회관 등 생활 기반 시설을 단계적으로 마련했다.
마을 시설들은 재난 발생 직후 곧바로 이재민을 위한 임시 거처와 구호 거점으로 전환됐다. 숙식이 가능한 공간과 공동 위생시설, 물품을 보관·분배할 수 있는 장소가 한곳에 갖춰지면서 대규모 공동생활이 가능했던 것이다.
수십명의 주민이 공동생활을 하는 일이 시설만 갖춰졌다고 해서 쉬운 일은 아니다. 못지 않게 마을 공동체의 결속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달 이어온 마을 회의와 자치위원회 활동, 마을 축제 등을 통해 쌓인 신뢰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끈끈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은 한 공간에 모여 큰 갈등 없이 공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광현 신안리 이장(63)은 “10년 전에 집집마다 방송 시스템을 설치했는데, 그 덕에 산불 때 모두 대피할 수 있었다”며 “산불이 지나간 뒤에도 똘똘 뭉쳐서 버틴 덕분에 지난 여름과 겨울 모두 아픈 사람 없이 무탈히 재난을 이겨낸 것 같다”고 말했다.
신안리의 산불 대응 과정을 모니터링한 강성원 그린피스 캠페이너는 “단단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공동체 중심의 회복이 이뤄지면서, 다른 지역보다 산불 피해 복구가 더 빠르게 진행됐다”며 “공동체의 노력이 기후 재난에 대한 회복 탄력성을 높이고, 에너지 전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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