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는 침술의 과학적 원리 [강석기의 과학풍경]

한겨레 2026. 3. 1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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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침술은 인간의 심리를 속이기 위해 발명된 최고의 위약일지도 모른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서구 과학계가 침술을 위약이라고 본 게 사실이지만 21세기 들어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오면서 지금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동료 서구 과학자들에게 모국이 기원인 침술을 옹호하지는 못할망정 '인간의 심리를 속이기 위해 발명된 최고의 위약'이라니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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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침술은 인간의 심리를 속이기 위해 발명된 최고의 위약일지도 모른다.”

최근 자연과 인간에서 속임수의 기원과 진화를 다룬 책을 읽다가 위의 구절을 접하고 전통 동양의학을 바라보는 서구 과학계의 시각이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약(플라세보) 효과란 효과가 없는 약물이나 처치를 효과가 있다고 믿고 복용하거나 받았을 때 증상이 호전되는 현상이다.

지난주 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 사이트에서 최근 호 목차를 훑어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침술의 뒤에는 어떤 과학이 있나?’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특집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침술의 폐해가 심각해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 국립과학원(NAS)이 발행하는 권위 있는 학술지까지 나선 것일까.

한의사가 침을 놓을 때 바늘을 돌리면 찌릿찌릿한 느낌이 든다. 세포 사이 공간인 간질의 연결체인 근막의 주성분인 콜라겐 섬유망이 힘을 받아 변형되며 전기신호가 발생한 결과다. 각 이미지의 숫자는 바늘의 회전수다. 미국국립과학원회보 제공

그런데 글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필자의 예상과는 반대로 침술의 과학적 원리가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서구 과학계가 침술을 위약이라고 본 게 사실이지만 21세기 들어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오면서 지금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마약성 진통제 남용으로 사망자가 급증하자 보건당국이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로 침술의 진통 효과를 검증하는 연구를 지원한 게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침술의 진통 메커니즘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런 예 가운데 하나가 아데노신수용체를 통한 진통 효과다. 2024년 ‘통증 저널’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아데노신수용체에 달라붙어 신호를 방해하는 물질인 카페인이 들어 있는 음료를 섭취하면 침술의 진통 효과가 반감된다(위약 효과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통증으로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갈 때는 커피를 자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학계에서 침술이 엉터리라며 공격할 때 즐겨 언급하는 경락과 경혈(혈자리)도 뭔가가 있다는 게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생쥐에게 심각한 전신 염증인 패혈증을 유도한 뒤 전침(전기가 흐르는 침)을 이른바 경혈에 해당하는 족삼리와 수삼리 위치에 놓으면 염증이 가라앉지만, 천추 자리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족삼리와 수삼리를 자극하면 특정 뉴런(신경세포)이 활성화돼 미주신경을 거쳐 부신에서 항염증 물질을 분비한다는 메커니즘까지 밝힌 논문이 2021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특집기사에 따르면 최근 연구자들은 특정 질환을 치료하는 데 최적의 혈자리를 찾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데이터를 모으고 있는데(tara-repository.mgb.org),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지원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대규모언어모델(LLM)로 빅데이터를 해석해 인체의 3차원 경락과 혈자리 지도를 내놓으면 지난 수천년 동안 소수의 ‘명의’들만 터득한 경지가 실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필자가 읽은 위약 효과 속임수에 대한 책을 쓴 저자는 중국에서 태어나 대학원(석사)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해 눌러앉은 생물학자다. 동료 서구 과학자들에게 모국이 기원인 침술을 옹호하지는 못할망정 ‘인간의 심리를 속이기 위해 발명된 최고의 위약’이라니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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