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김정은 "평화는 바라는 게 아냐"…북한판 '힘을 통한 평화'?

김아영 기자 2026. 3. 17. 16: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는 것이다."

지난 14일 방사포가 불을 내뿜는 훈련 현장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날 김정은은 실전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600mm 초정밀다연장방사포 체계 성능에 무한 신뢰를 드러낸 뒤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공고한 평화를 쟁취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평화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야만 담보할 수 있으며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투해 지켜내야 하는 달성의 대상이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군사력을 통한 평화, 언뜻 낯이 익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즐겨 쓰는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힘을 통한 평화'는 트럼프 행정부만의 고유 명제는 아닙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 시대 격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미 공화당의 전통 지지 세력인 네오콘을 중심으로 내려오는 하나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 스스로 여러 차례 힘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등 힘을 통한 평화는 트럼프 2기를 대표하는 중추적인 대외 노선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힘을 통한 평화에 기반한 과감한 행동'을 통해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재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월 24일, 백악관)

북한은 트럼프 개인에 대한 비판은 자제하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날카로운 분석을 해온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지난달 20-21일 노동당 제9차 대회 사업총화보고(26일자 보도)에서 미 행정부의 '힘을 통한 평화'에 대한 입장을 직접 밝히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발표 당일에는 김정은이 미국에는 대화의 여지를 남기고 한국은 영원한 적이라고 규정한 점이 대체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국제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북한의 향후 행보를 가늠해 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인 만큼 이 취재파일에서 관련 내용을 다시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정은은 보고에서 "미국은 이른바 '미국 우선주의'의 간판 아래 다른 나라들의 주권과 영토 완정, 안전 이익은 전혀 개의함 없이 오직 패권적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힘을 통한 평화'를 제창하면서 주권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무력 사용을 서슴없이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 미국의 '전횡'으로 인해 국제절서에는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세계 정세가 이전보다 훨씬 가변적이 됐고, 예측 불가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행보로 인해 "힘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불안정성이 높아진 세계 정세 속에서 각 국가가 가진 군사력의 가치가 종전에 비해 매우 중요해졌다는 인식을 나타낸 것이죠. 김정은은 또 주민들에게 "힘은 힘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힘이 강하면 생존과 함께 발전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침략의 희생물이 되고 주권과 영토도 강탈당한단 점도 강조했습니다. 즉 미국으로부터 침략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 기본적으로 힘이 필요하고, 한 국가로서 존중을 받기 위해서도 힘을 가져야 한다고 힘 줘 이야기한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김정은이 이러한 분석과 대응 방안을 내놓은 타이밍입니다. 북한의 당 대회는 지난달 19~25일 개최돼, 미국의 대 이란 공격이 있기도 전에 막을 내렸습니다. 북한으로선 미국이 지난해 6월 이란 핵시설을 타격한 '한밤의 망치(Midnight Hammer)' 작전, 지난 1월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한 '확고한 결의(Absolute Resolve)' 작전을 관찰한 데 따른 결과를 내놨던 셈입니다. 그런데 당대회 폐막 직후 또 하나의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죠. 현재도 진행 중인 이란에 대한 이른바 '장대한 분노(Epic Fury)' 작전은 미국이 과시하려 하는 힘을 통한 평화가 극단적일 뿐만 아니라, 어찌보면 무모하게까지 발현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하메네이 폭사와 이란 공습을 지켜본 김정은의 자기 확신과 신념이 더욱 굳어졌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13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란 사태를 언급하며 "6,700km밖의 전쟁이 한반도를 흔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 장관은 "세간에서 쉽게 전쟁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하는데 전쟁을 준비하면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라고 했습니다.(13일, 남북회담본부 회담장에서 개최된 '한반도 평화전략 자문단' 제3차 회의 발언). 군비 경쟁은 평화가 아니라 군사적 충돌을 부른다는 경고를 담은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 정부가 내세운 '평화'와 '공존'의 논리가 아닌 트럼프 식의 '힘을 통한 평화' 논리에 십분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는 중인 듯 보입니다.

처음 언급한 김정은의 발언을 다시 소환해 보겠습니다. "평화는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는 것"이라는 김정은의 이 말은 군사 훈련 현장에서 나온 일회성 발언으로 보기엔 그 함의가 상당히 있어 보입니다. 북한이 바라보는 트럼프 2기의 국제질서와 자신들이 견지할 '평화'론을 바탕에 둔 정치적 메시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핵무력 강화와 재래식 장비 현대화를 축으로 하는 북한식 '힘을 통한 평화'는 앞으로도 계속 강조될 가능성이 큽니다.

(사진=연합뉴스)

김아영 기자 nina@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