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스토킹 살해’…예견된 비극, 막을 수 없었나

'예견된 비극'이었습니다.
지난 14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일어난 '스토킹 살해 사건'.
가해자인 40대 남성 A 씨는 남양주시 오남읍 도로에서 과거 교제했던 20대 여성 B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B 씨가 타고 있던 차량 창문을 전동 드릴로 부순 뒤였습니다.
A 씨는 범행 이틀 전부터 피해자가 다니던 직장 주변을 살폈습니다. 말 그대로 '계획된 범행'이었습니다. 기존 직장을 옮겨가면서까지 위협에서 벗어나려 했던 피해자의 노력도 소용없었습니다.
피해자의 구조 신호는 수차례 이뤄졌습니다.
가정폭력과 스토킹 등으로 올해 들어서만 5차례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고, 자신의 차량에서 발견된 위치추적 의심 장치 역시 경찰에 두 차례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의 끝은 처참했습니다. 경찰의 안일한 대응이 또 한 번 '스토킹 살해'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 아니냐는 질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지난 5년간 스마트 워치 소유에도 불구하고…지난 5년간 '살인·살인미수' 스토킹 피해자 20명 넘어
피해자 B 씨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장치는 사실상 '스마트 워치'가 유일했습니다. 지난 1월 가해자 A 씨가 자신을 또 찾아오자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해 받았던 물품입니다.
사건 발생 2분 전 B 씨는 이 시계를 눌렀지만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다가올 수 없게 만드는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A 씨에 대해 신청한 조치는 피해자 B 씨에게 연락하거나 주거지와 직장 등 100m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스토킹 잠정조치 1~3호뿐, 정작 A 씨의 접근 여부를 알 수 있도록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하게 하는 잠정조치 3호의 2는 법원에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장치는 1차로 1㎞, 이후 300m 안으로 접근했을 때 알람을 울리게 돼 있어, 만약 해당 조치가 이뤄졌다면 피해를 막았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이들은 가해자가 과거 다른 성범죄 전력으로 전자발찌를 착용한 관리 대상이었고, 이미 수차례 피해자의 신고가 들어왔던 상황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차고 있던 전지발찌와 위치 추적을 연동했다면 쉽게 가해자의 '위험한 접근'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광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21년부터 지난해 8월 말까지 스마트워치를 제공받은 스토킹 피해자 대상 살인 또는 살인 미수 범죄는 23건에 달합니다.
단순히 '스마트워치'를 제공한 것만으로는 피해를 방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적극적인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겁니다.
■ '잠정조치 3호의 2'는 왜 이뤄지지 않았나 ?
경찰은 '잠정조치 3호의 2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사건 초기부터 구치소에 유치할 수 있는 잠정조치 4호와 구속 영장 신청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1월부터 이어졌던 피해자의 신고와 경찰의 수사 정황을 살펴보면 이 역시 앞뒤가 안 맞는다는 지적입니다.
경찰은 B 씨의 신고가 계속되자 뒤늦게 심각성을 인지했고, 지난달 27일 상급기관인 경기 북부경찰청에서 관할 경찰서에 A 씨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과 잠정조치 4호(유치장 또는 구치소 유치) 신청 검토를 지휘했습니다.
당시도 이미 첫 신고를 받았던 때 보다 한 달 이상 지나간 시점이었지만, 관할 경찰서인 구리경찰서는 위치 추적 장치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월 28일, 피해자가 처음 위치 추적 장치를 신고했던 시점부터 계산해도 이미 한참이 지났고, 일반적으로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받으려면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경찰이 처음부터 '시급하게' 구속을 검토했다는 해명과는 배치되는 정황입니다.
그 사이 경찰의 A 씨에 대한 두 차례 출석 요구도 모두 묵살됐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가 변호인을 선임해 조사받겠다고 하면 출석 일시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국과수 감정 결과도 나오지 않아 영장 신청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습니다.
■ "강력한 선제 조치 취하겠다"던 경찰의 약속은 현장에선 무용지물
이번 사건에 경찰을 향한 비판 수위가 높은 이유는 "스토킹 등 교제 폭력 범죄에 대해 '과할 정도의 강력한 선제적 조치'를 취하겠다"던 경찰의 기존 선언과도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지난해 잇따른 교제폭력·스토킹 살인 사건 이후 '관계성 범죄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선제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접근 금지 대상자를 전수 점검하고 재범 위험이 높은 경우 적극적으로 구속이나 격리 조치도 적극 검토하겠다는 방침이었습니다. 특히 고위험 스토킹 사건에 대해서는 재범 위험성 평가 실시해 강력 대응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경찰이 약속했던 원칙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피의자 ‘방어권 침해’를 이유로 구속에 인색하고, 경찰과 검찰은 법원의 인용률이 낮다며 적극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지 않는 사이 또 한 번의 비극이 되풀이된 겁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경찰청은 "경찰의 부실 대응에 대해 즉시 감찰 조사에 착수했다"며 "전반적인 사건 처리 과정에 대해 신속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번 사건은 스토킹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방지 대책이 미흡함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적극적으로 격리하고 가해자의 위치 정보를 신속히 파악하며 전자발찌와 스마트워치를 연동하는 등 스토킹 교제 폭력 피해자가 세심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관련 조치를 신속하게 추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 '죽어야만 끝나는 범죄'…'혼자'라는 절망감에 빠지지 않겠다는 약속은 유효한가 ?
'죽어야만 끝나는 범죄'.
스토킹 사건을 수사하고 변호했던 전문가들은 이 범죄를 이렇게 표현하며, 한목소리로 스토킹 범죄가 얼마나 잔인하게 피해자를 잠식하는지 강조했습니다.
2022년 신당역에서 일어난 스토킹 살인 사건 때도, 지난해 대구와 울산 등지에서 발생했던 살인 혹은 살인미수 사건에서도 범죄 유형은 비슷했습니다.
피해자가 보낸 수차례의 '구조 신호'는 묵살됐고, 가해자가 흘린 범행의 '전조 증상'은 무시됐습니다.
오랫동안 스토킹 범죄 피해자를 변호했던 한 법조인은 "스토킹 범죄를 막고 처벌하는 제도의 진전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열린 교제폭력 대응 관련 토론회에서 "단 한 명의 피해자라도 '혼자'라는 절망감에 머물지 않도록, 법과 제도가 공감하고 작동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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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수 기자 (kbs03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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