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칼럼] 거꾸로 가는 국내 ESG 정보공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2026. 3. 1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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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공시 로드맵과 기준 도입... 자본시장에 중요한 정책적 신호 
ESG 공시 확대가 아닌 ‘최소 요건 준수’ ... 제도 도입 취지에 혼선    
시장 현실과 괴리된 ESG 정보 공시제도 ... ‘역진성’ 논란 제기

| 서울=한스경제 이치한 ESG행복경제연구소 소장 |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ESG 정보공시 제도화 방안(공시 로드맵 및 공시기준)은 국내 자본시장에 중요한 신호를 던졌다. ESG 정보공시의 제도화를 통해 기업의 지속가능성 관련 위험과 기회를 자본시장 정보 체계 안으로 편입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한편으론 ESG 공시 제도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시장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로드맵에 따르면 ESG 정보공시는 2028년부터 연결 자산 규모 30조 원 이상 대형 상장사 58개 기업을 대상으로 먼저 의무화된다. 이후 자산 1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하고, 국제 동향과 기업의 준비 상황 등을 고려해 추가 확대 여부를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당초 정부가 2021년에 제시했던 계획과 비교하면 상당한 후퇴라는 점이다. 당시 정부는 2025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ESG 공시를 의무화하고, 2030년에는 전체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한다는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발표에서는 적용 대상이 크게 축소되면서 ESG 공시 제도의 도입 속도가 상당 부분 늦춰졌다. 더욱이 시장의 현실을 보면 정책과의 괴리는 더욱 뚜렷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5년 한 해 동안 코스피 상장사 가운데 이미 225개 기업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으며, 이들 기업은 글로벌 ESG 공시 기준을 참고해 다양한 지속가능성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시장은 자발적인 공시 확대를 통해 ESG 정보 공개 수준을 이미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려 왔는데, 정책 로드맵은 오히려 그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회계기준원 산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가 국내 ESG 공시기준을 공개하면서, ESG 공시 제도의 방향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KSSB 기준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기준을 토대로 마련된 것으로, 제1호 '지속가능성 관련 재무정보 공시를 위한 일반 요구사항'과 제2호 '기후 관련 공시'로 구성돼 있다. 앞으로는 환경·사회·지배구조 전반에 대한 추가 기준도 단계적으로 제정될 예정이다. 

그러나 현재 제도 설계만 놓고 보면 국내 ESG 공시 체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역진적 구조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

첫째, 공시 로드맵의 속도 후퇴다. ESG 공시 의무화의 적용 범위를 자산 30조 원 이상 초대형 기업으로 제한하면서 제도 도입의 확산 속도가 크게 늦어졌다. 이는 ESG 정보 공개를 자본시장 인프라로 확산시키기보다는 일부 대형 기업에 국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 최소 기준 중심의 공시 체계다. KSSB 기준은 원칙 기반의 공시 구조를 채택하고 있으며 현재는 기후관련 공시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기업들이 이를 ESG 공시의 '최소 요건'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다. 이 경우 기존에 자발적으로 제공되던 ESG 정보가 오히려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공시 제도가 최소 기준 충족 중심으로 작동하게 되면 자본시장의 정보 수준은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

셋째, 글로벌 공시 체계와의 정합성 문제다. 이미 많은 국내 기업들은 GRI, SASB, TCFD, EU의 ESRS, UN SDGs 등 다양한 국제 기준을 참고해 ESG 정보를 공시해 왔다. 만약 기업들이 KSSB 기준만을 중심으로 공시 체계를 재편하게 된다면 기존의 글로벌 공시 프레임과의 연계성과 비교 가능성이 약화될 가능성도 있다.

이 세 가지 구조가 동시에 작동할 경우 국내 ESG 공시제도는 정보의 목적 적합성과 정보 비대칭 해소라는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보다, 오히려 공시 수준을 낮추는 역진적 결과를 가져올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ESG 공시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정보 인프라다. 투자자는 ESG 정보를 통해 기업의 기후 리스크와 공급망 위험, 인권 문제, 지배구조 리스크 등 기업의 미래 가치에 영향을 미칠 다양한 요인을 판단한다. 공시체계는 최소 기준을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정보 수준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글로벌 자본시장과 정합성을 갖춘 공시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미 기업이 축적해 온 ESG 공시 경험이 제도화 과정에서 후퇴하지 않게 하고, 제도 설계 역시 '역진성'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ESG 공시제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시장의 정보수준을 높이는 데 있다. 결국 ESG 공시는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정보를 투자자에게 보다 유용하게 제공함으로써 합리적 판단을 돕고, 자본시장 의사결정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제도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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