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이성로 변호사

조중연 2026. 3. 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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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 장편소설 ‘남방여왕-괴물의 탄생’] ①프롤로그_이성로 변호사

<연재 순서>

1 프롤로그_이성로 변호사
2 어두움의 끝_유령
3 육짓것의 시간
4 '게메'란 말은….
5 심층취재부
6 제주도판 '그것이 알고 싶다'
7 제주도 3대 영구 미제 사건
8 관덕정 살인 사건
9 유력 용의자의 등장
10 새벽의 루트
11 두 개의 모순점
12 나보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13 신탁의 밤

언제부터 이렇게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던 걸까. 내가 믿고 있던 것과 추구한 것들에 대한 배신과 실망감, 추악한 진실들. 대놓고 본색을 드러내는 놈들이라면 인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새벽 부뚜막 고양이처럼 꼬리 살살 말고 기회 엿보다가 뒤통수치는 것들이라니. 자리 하나 차지하겠다고 온몸 불사르며 달려드는 하루살이 인생들이라니. 정말 몸서리치게 환멸이 느껴지는 새벽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다가오고 있다. 두 달 가까이 남은 새천년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쯤 고등학교 동창 성랑이는 귀가했겠지. 직원들 월급 줘야 한다고, 내일 못 주면 이틀 밀리는 거라고, 평일에는 술푸대로 살았으니 토요일 하루쯤은 가족과 보내며 사람 구실 좀 해보고 싶다고, 한 잔 더 하자는 제안을 뿌리쳤다. 역시 3차는 무리였다. 

"나 먼저 감져." 

사내가 자리를 훌훌 털면서 김성랑에게 말했다. 

"어디 가려고?" 

"나도 몰르크라." 

그렇게 술집을 나와 바닷가를 거닐었던가. 탑동 매립지 따라 동한두기 절벽을 서성였던가. 용연(龍淵) 줄다리가 있던 그 자리. 십여 년 전 철거되었으니 아주 먼 옛날의 일은 아니다. 로프를 지탱하던 콘크리트 구조물 앞에서 건너편 서한두기를 하염없이 내려다본 것 같다. 줄다리가 있었을 때는 1분도 안 걸리던 서한두기가 지금은 심리적으로 십 리쯤 멀어진 느낌이다. 

요즘 들어 그렇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꽤 늘었다. 전에는 전화 한 통이면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말 걸기가 두렵다. 언제부턴가 말을 붙여도 절벽 같은 침묵만 되돌아오고, 급기야 존재 사이에 놓여 있던 다리마저 끊겼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내창을 700미터쯤 거슬러 올라가면 내왓당이 있었다고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적혀 있다. 서문 밖 1km 지경이고, 1882년에 훼철했다고 쓰여 있다.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열(十) 폭의 무신도가 내왓당이 존재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언제 시간 내서 조사를 해봐야겠는데……. 

제주도 4대 국당(國堂) 중 하나이고, 『세조실록(世祖實錄)』에도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1882년 발생한 일이라면 필시 정치적 사화를 입었을 게다. 특히 무신도 열두 폭 중 열 폭만 살아남았다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군가 사화를 피해 열두 폭의 무신도를 품고 도망가고, 그 뒤를 칼 빼 들고 쫓는 장면이 아슴하게 그려진다. 그러다가 열 폭만 회수되고 두 폭을 잃어버렸겠지……. 더욱 애매한 것은 '누군가' 내왓당을 훼철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주어가 생략된 것이다. 

새벽 바닷바람에 바싹 마른 낙엽처럼 고슬고슬한 겨울 냄새가 실려 온다. 술기운이 좀 달아나는 것 같다. 마흔이 되면 누구한테도 자신 있게 신념을 밝힐 수 있고, 가치 판단을 정확하게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동안 살아온 경험과 읽은 책들, 그런 것들이 종합적인 판단의 잣대가 되고, 가치관이 준엄한 판단을 내리리라 기대했는데,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영 딴판이다. 특히 주변 사람들의 행보를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가 없다. 누군가 말했다. 

느 혼자 세상 근심 다 졌나? 무사 경 나라 잃은 백성추룩 어깨 축 늘어져 댕겸시냐? 

작작 좀 하라는 말이다. 그때마다 사내는 쌍심지를 켜고 되묻고 싶었다. 

나가 무사 이추룩 행 댕기는 거 같으냐? 

멀리 갈치잡이 배들이 집어등을 훤히 밝히고 떠 있다. 5성급 호텔 정원의 매립 조명처럼 휘황하다. 어승생악쯤에서 내려다보면 제주 시내 가로등과 그 위의 집어등이 비현실적인 풍광을 자아낼 터였다. 지구와 우주를 이어주는 성층권처럼 독립된 공간으로 보인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해역(共海域)이라고 할까. 순간 살풍 같은 매서운 바람이 뒷덜미를 후려친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얼굴을 돌린다. 뭔가 후다닥 몸을 숨겼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그 선거 이후 사내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덫에 걸려 발버둥 칠수록 자꾸만 몸을 옥좨 오는 느낌이었다. 턱밑까지 위협이 느껴져 몸서리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각개전투식으로 들어오던 공격들이 최근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바뀌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삼지창처럼 책사 둘러 세우고, 설계자가 탁자 정중앙에 앉아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자꾸만 상상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분명히 경고였다. 이외에도 주변에서 작고 사소한 사건들이 벌어져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든다. 의심병이 도졌나 했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직감만은 피할 수 없다. 아내 역시 아파트 동 입구에 자꾸만 낯선 무리가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냐며 핏대를 세웠다. 이제 방황 그만하고 개점휴업 상태인 변호사 사무실에 집중하라는 말로 해석되었다. 

아내의 말을 들으니 더욱 조바심이 생겼다. 

경헐 거여. 이번 일만 정리되믄. 

사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아내는 아예 말을 말자는 듯이 앵돌아졌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로 저녁마다 집에 전화를 걸게 된다. 오늘은 딸아이와 통화했다. 늦장가 가서 낳은 예쁜 딸이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뺨에 뽀뽀를 해주면 아휴, 술 냄새 하며 도끼눈 흘기는 게 제 어멍을 쏙 빼닮았다. 역시 사내놈보다 딸의 애교에 디테일이 있다. 한창 예쁜 짓 할 나이였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내는 비번이라 하루 종일 집에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 일과 엮인 것은 정의감 때문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되지. 적어도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사람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주변에서 또라이라 손가락질해도 내 생각은 이렇다고 꼭 밝히고 싶었다. 

너희들은 야합이여. 최소한 부역자여. 

처음에는 단순히 불법 선거 운동 의혹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검질 하나 뽑아 들었는데 감자 뿌리처럼 개미 소굴이 딸려 나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몇몇 개미가 툭툭 나가떨어지기도 했고, 추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악착같이 버티는 놈도 있었다. 선거판은 검질로 위장한 개미지옥 같았다. 구불구불한 통로로 엮이고 엮인,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도 모를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그 개미지옥에 발을 들였으니, 당연히 출구는 없었다. 

아마 그때쯤인 것 같다. 주변에 기웃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난 게. 사실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다. 바람처럼 흔적이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있다. 분명 없는데, 분명히 있다. 몸을 숨기는 데 능숙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은 습관이 체질화되어 있다. 훈련이 잘 되어 있다. 

새벽 어스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 사내는 세 시간의 방황을 끝으로 차가 세워진 제주북초등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뗀다. 차에서 30분만 책을 읽다가 술이 깨면 들어갈 생각이다. 좀 더 늦기 전에 제주도 무속 책을 사야지……. 무작정 들이미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 기초를 쌓은 다음 전문가들을 만나봐야지. 그래야 대화가 통할 거고. 그러다 보면 사라진 내왓당 무신도 두 폭에 대한 퍼즐이 맞춰질 거야. 

사내는 탑동 체신아파트를 지나 북초등학교 쪽으로 걷는다. 지난달 중순부터 차를 대던 곳이다. 일도 지구 집 쪽으로 순방향이고 무엇보다 공간이 널널해서 자주 애용하고 있다. 은색 쏘나타 옆에 1톤 트럭이 주차되어 있다. 며칠째 계속 서 있는 차다. 매일 주차를 하다 보니 동네 차들이 눈에 익었다. 두꺼운 녹색 천막을 덮은 모양이 배추나 과일을 떼다 파는 행상 트럭 같다. <다음편에 계속>
조중연.

조중연

2008년 계간『제주작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탐라의 사생활』,『사월꽃비』가 있다.

kalito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