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 맞은 서글픈 추억

김희국 기자 2026. 3. 1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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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경비하기 위해 경찰들이 철조망 앞에서 지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6일 오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제98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아 2관왕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케데헌은 지난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았습니다. 이어 지난달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시각매체용 최우수 노래) 부문에서 K-팝 장르 최초로 수상한 데 이어 아카데미까지 석권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얽힌 서글픈 기억을 완전하게 씻어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2015년 2월 22일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돌비극장으로 무작정 갔습니다. 돌비극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했던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멀리서라도 실물을 보고 싶은 욕심이 컸습니다. 당시 LA에 잠시 살고 있던 때라 집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상식이 열리기 3시간 전에 도착했습니다.

다소 무모했지만 나름 계획이 있었습니다. 예전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아카데미 시상식 장면을 떠올려 보면 세계적인 배우나 감독들은 돌비극장 앞에 깔린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합니다. 그러면 레드카펫 주위에서 취재진이 촬영을 하거나, 팬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즉, 시상식이 열리는 돌비극장에는 못 들어가도, 입구에서 레드카펫을 밟는 스타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게 실수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찰이 할리우드 거리에 철조망을 치고 차단해 돌비극장 주위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 몰래 살짝 가보려고 했지만 허리에 찬 권총을 보고 포기했습니다.

심지어 배우나 감독의 얼굴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탄 것으로 추정되는 고급 승용차가 부지런히 돌비극장으로 가는 모습만 철조망 너머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런 처량한 상황을 저 혼자 겪지는 않았습니다. 정보를 모르고 무작정 찾아온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동병상련의 처지라 어디서 왔냐고 슬쩍 물어보면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유럽,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등. 대부분 미국 여행 중 들렀다고 했습니다. 몇 명은 오직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러 왔다고 말하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가뜩이나 기분도 좋지 않은데, 평소 LA에 잘 오지 않던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마음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습니다. ‘저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스타가 탄 것으로 추정되는 고급 승용차가 지날 때마다 비를 맞으며 철조망에 사이로 스타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종교단체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이상한 분장을 하고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그들이 든 피켓 내용과 퍼포먼스는 너무 민망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을 본 현지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양측이 심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근처에 경찰이 워낙 많아 물리적인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싸움을 보다 맥이 빠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아카데미 시상식에 얽힌 서글픈 추억입니다. 이후 아카데미 시상식에 관심이 시들해졌습니다.

그러다 서글픈 추억을 한 방에 날리는 쾌거를 접했습니다. 2020년 제92회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최고 영예인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받아 4관왕에 올랐습니다. 봉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언급한 대목을 생각하면 지금도 짜릿합니다.

6년 만에 다시 ‘케데헌’이 기분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젠 11년 전 할리우드 거리에서 비 맞으며 철조망을 부여잡았던 서글픈 추억과 완전히 이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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