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키울 때 좋대서 썼는데” 1000만병 팔린 후 1700명 죽었다…끝나지 않은 참사 [김수호의 리캐스트]
채경선 8·31 사회적가치 연대 대표
“지속적 관심·지원 필요”
2011년 8월 31일. 연년생 두 아이를 둔 채경선(51) 씨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그날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날이었다. 2009년 1월 아들을 출산한 채 씨는 산후조리원에서 가습기살균제를 접한 후 2011년 8월까지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라벤더향’을 사용했다. 라벤더향이 은은히 퍼지는 방 안에서, 채 씨 가족은 매일 밤 한 이불을 덮고 잠에 들었다.

“아, 이래서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아팠구나, 그때 알았어요.” 채 씨의 아들은 생후 3개월부터 기침과 폐렴을 앓기 시작했다. 연년생인 딸도 태어나자마자 아팠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채 씨도 픽픽 쓰러지곤 했다. 채 씨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응급실을 밥 먹듯이 오갔다.
채 씨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아기를 키우는 집에는 가습기가 설치된 경우가 흔했고, 세척을 위해 살균제를 사용하는 이들도 많았다. 임산부와 아이, 가족의 건강을 위해 썼던 가습기살균제가 독약이었을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1994년 처음 출시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사용자들의 폐 손상 등을 일으킨 사건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어린이와 임산부를 중심으로 피해자가 나왔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폐 질환’으로만 여겨졌다.
이후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에 ‘젊은 나이, 출산 직후 여성’을 중심으로 원인 미상 중증 폐 질환 환자들이 다수 입원하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4개월 뒤인 2011년 8월 정부는 “가습기살균제가 원인 미상 폐 손상의 위험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미 관련 제품이 1000만 병이 팔린 뒤였다.

2014년부터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목소리를 내던 채 씨는 2021년 8월 31일, 피해자 부모들과 함께 ‘8·31 사회적가치 연대’를 결성했다. 공식적인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시작일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이름 지었다. 8·31 사회적가치 연대는 피해자와 시민사회활동가, 의학박사 등으로 구성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다.
단체 회원들은 피해 질환 정보를 공유하고, 치료법을 모색하는 등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8·31 사회적가치 연대 회원들은 국가독성과학연구소 이규홍·양효선 박사가 주도한 ‘PHMG(가습기살균제 주성분) 노출이 미토콘드리아 기능 및 신경 건강에 미치는 영향’ 연구에 피실험자로 참여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PHMG는 미토콘드리아를 손상시켜 만성 피로 증후군(CFS) 유발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년째 만성 피로를 겪고 있는 채 대표는 “피해 사실을 규명하는 연구도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CFS도 반드시 피해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 증상은 폐 질환 외에도 다양하다”며 “피해 증상과 가습기살균제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채 대표는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개정안’에 대해 “장족의 발전”이라면서도 “이것만으로 사태가 완결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달 12일 국회 문턱을 넘은 개정안의 핵심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참사’로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대폭 강화한 데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기업과 국가는 손해배상책임을 공동으로 부담하며, 기존 기후에너지환경부 소속 피해구제위원회는 국무총리 소속 배상심의위원회로 개편·운영된다. 피해자에 대한 생애 전주기 지원(치료 휴가 보장과 교육 지원) 등도 마련됐다. 배상심의위 구성 등이 끝나면 올 하반기부터 국가 배상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채 대표는 배상심의위가 ‘얼마를 줄 것인지’보다 ‘어떻게 줄 것인지’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해자들은 평생 고통을 안고 간다”며 “단발적 보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생명안전기본법에는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 △안전권과 피해자의 권리 규정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무 명시 △안전영향평가제도 도입 등이 담겨 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123대 국정과제에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위한 법령 제정’을 포함했지만 해당 법안 심의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어요.” 지금까지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한 사망자는 17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단군 이래 최악의 환경 참사임에도 불구하고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점점 잊혀가고 있다. 이따금 “지겹다”는 말을 듣는 채 대표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은 적도, 기업 측으로부터 사과를 들은 적도 없다. “이 참사가 잊히지 않기를, 또 유사 사고가 재발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개정안 국회 통과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채 대표는 피해자들의 ‘안전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낼 계획이다.
<편집자주>

김수호 AX콘텐츠랩 기자 suh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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