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인생 한 줄 쓰려 나는 흰 산으로 간다 [강의실에서 히말라야로 ①]

이수환 부산대 산악부(22학번) 2026. 3. 1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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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학생산악연맹 6,000m 히말라야 원정 훈련기
위험한 원정에 손 든 이유
올해 1월 진행한 전북 완주 호오스테이 빙벽장에서의 4차 훈련. 안자일렌 훈련을 하고 있는 부산 지역 대학생 대원들.

"수환아! 발뒤꿈치 높다고 몇 번을 말하냐!"

원정대장인 조벽래 선배(동아대 88학번)의 불호령이 날카롭게 날아와 고막에 꽂혔다. 전북 완주 호오스테이 빙벽장의 거대한 빙벽, 내 몸은 허공에 매달린 채 굳어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선배들처럼 우아하게 아이스바일을 얼음에 "탁" 박아 넣고, 아이젠을 찬 발로 가볍게 "톡톡" 얼음을 차고 오르는 모습을 수백 번도 더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젠의 뾰족한 쇠발톱 하나에 간신히 체중을 싣고 있는 다리는, 진동모드의 전화가 온 것처럼 덜덜 떨렸다. 발을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수직의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추락할 것 같은 원초적 공포가 몸을 지배한다. 아이스바일을 쥔 팔에 힘이 빠진다. 슬슬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히말라야 6,000m대 고봉을 가겠다고 나선 원정대원이 고작 훈련지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니, 공포 속에서도 내 꼴이 바보 같고, 우스웠다.

지금 나는 히말라야 원정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주 바위와 얼음을 오르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얼음벽에 매달려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도대체 나는 어쩌다 이 춥고 위험한 세계에 제 발로 들어오게 된 걸까.

훈련 중 한자리에 선 대원들. 왼쪽부터 이창엽(동아대22), 송재우(동아대25) , 이재영(동아대23), 나유진(부경대23) 대원.

나는 항상 더 넓은 세상을 갈망했다.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이라는 울타리 밖, 낯선 세상에 대한 동경은 스무 살 때부터 바다 건너로 이끌었다.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파스타 가게 주방의 뜨거운 화구 앞에서 매일 11시간씩 팬을 돌렸고, 케이크 공장 냉동창고의 냉기 속에서 종일 박스를 날랐다. 그렇게 번 돈은 나를 더 넓은 세상에 던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래들이 유럽의 낭만적인 도시에서 '인생샷'을 남길 때, 나는 25kg의 큰 배낭을 짊어지고 흙먼지 날리는 길 위에 섰다. 인도의 낯선 골목을 걸었고, 기차 꼴등 칸에 웅크려 잠을 청했고, 네팔 쿰부 히말라야를 홀로 걸었으며, 두 발로 뚜벅뚜벅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을 넘었다. 나는 걷는 것을 사랑했고, 내 눈으로 직접 세상을 확인하는 것이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 사전에 '등반'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저 땅을 밟고 걷는 '여행'이 전부였다.

호오스테이 빙벽을 오르는 필자.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다

등반이라는 수직의 세계에 빠져든 건 우연, 아니 필연이었다. 군 전역 후 24세 늦깎이로 복학한 캠퍼스는 낯설었다. 신입생 때 친했던 형들은 이미 학교를 떠났고, 나는 그저 강의실 구석을 지키는 외로운 복학생 중 하나였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사람 냄새를 맡고 싶어 기웃거리던 중앙동아리 목록에서 '부산대학교 산악부'를 발견했다.

부산대 산악부 카페 후기 속 사진 한 장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로프 한 줄에 의지해 아찔한 절벽에 매달린 사람. 인간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바위를 맨손으로 오르는 그 뒷모습. 오랜만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 이거다.' 주저 없이 지원서를 넣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매주 주말 선배들을 따라 바위를 만지고, 뜨거운 여름 대둔산에서 장기 훈련을 견뎌내며 등반은 내 삶의 큰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부산 학생산악연맹BSAA 히말라야 원정대'의 일원이 되어 또 다른 '벽' 앞에 서 있다.

지난해 12월 1차 훈련 중 무박산행을 한 뒤 부산 백양산 애진봉에서 맞이한 일출.

부산지역 대학산악부 연합 고산등반이 시작된 셈이다. 원정대의 닻을 올리기 위해 9명의 대학생과 1명의 베테랑 알피니스트가 마주 앉았다.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고 수많은 고산 등반 기록을 가진 조벽래 선배가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부산대, 부경대, 경성대, 동의대, 동아대, 한국해양대 등 부산에 있는 대학 산악부에서 나름대로 '산 좀 탄다'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우리였지만, 선배의 압도적인 경력 앞에서는 그저 알을 막 깨고 나온 병아리에 불과했다.

이번 원정대는 '신진 산악인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꾸려졌다. 경험 많은 선배가 모든 짐을 지고 학생들은 뒤만 졸졸 따라가는 '가이드 투어'식 원정이 아니었다. 예산 확보부터 행정, 장비, 운행, 식량, 기록, 촬영, 의료까지. 원정의 A부터 Z를 재학생들이 직접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자급자족' 스타일이다. 우리는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라, 파키스탄 카라코람의 거친 환경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산악인'이자 '원정대원'이어야 했다.

지난해 12월 원정대 첫 준비 모임이 동아대산악회 OB회관에서 열렸다.

조벽래 선배가 강조하는 원칙은 하나였다.

"누구 때문에, 누구 덕분에. 그런 말은 없다."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다. 정상에 서는 것도 팀이고, 실패하는 것도 팀이다.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공동의 책임이지, 특정 개인의 잘못이나 성과로 나눌 수 없다는 것.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 말의 무게를 체감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차 훈련 중, 백양산 정상에 올랐다.

"그 힘든 걸 왜 하는 거야?"

드디어 대망의 첫 훈련. 해가 다 떨어진 오후 6시에 집합이라니 시작부터 불길했다. 텐트와 식량, 등반 장비로 꽉 채운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어둠이 내려앉은 부산 백양산을 오르는 야간 산행이 시작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양산 애진봉에 도착해 텐트를 치고 저녁을 해 먹었다. 이제 침낭 속에 들어가 지친 몸을 누이나 싶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1시간 뒤 철수. 다시 운행한다."

겨우 1시간 눈을 붙이기 위해 이 칼바람 속에 텐트를 쳤단 말인가? 다시 짐을 싸서 이동하고, 얼마 못 가 다시 텐트를 치고, 밥을 하고, 1~2시간 쪽잠을 자고 다시 철수.

지난해 9월 부산대 산악부 동료들과 무명리지 등반.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2월의 칼바람에 몸은 점점 얼어붙기 시작했고, 반복되는 의미 없는 노동에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지?'

묵묵히 앞사람의 뒤꿈치만 보고 걷는 동안 머릿속은 불만으로 가득 찼다. 내가 오늘 밤 한 일이라곤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빙빙 돌며 텐트를 폈다 접었다 한 것뿐이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맞이한 붉은 일출. 하지만 감동보다는 현실적인 공포가 앞섰다. '내가 이걸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훈련은 다음 회차에도 똑같이 반복됐다. 불만이 한계에 달할 때쯤, 조벽래 선배의 설명이 비로소 귀에 들어왔다.

몇 년 전 인도 배낭여행 할 때의 나.

우리가 향할 카라코람 히말라야 6,000m 고지. 그곳은 여기보다 산소는 4분의 1 수준이고,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극한 상황에서 텐트를 치는 데 10분 걸릴 것을 30분 동안 헤매다가는, 이미 모두가 얼어 죽어 9시 뉴스에 나올 것이 뻔했다.

지금 이 지루한 반복 훈련은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니었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몸이 기억해 생존 본능처럼 움직이게 만드는, 철저한 '생존 시뮬레이션'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날 정상 공격을 위한 실전연습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원들의 얼굴에서 지루함이 사라졌다. 평균 나이 24세 청춘들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짜증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주 주말, 배낭을 꾸려 산으로 향하는 내게 친구들은 걱정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보낸다.

"그 힘든 걸 왜 하는 거야?"

물음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말문이 막힌다. 사실 나도 명확한 답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왜 고생을 사서하며, 굳이 저 높은 히말라야의 고봉까지 가려 하는가. 어쩌면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늘도 배낭을 메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배낭여행 중 혼자 네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했다. 딩보체 인근.

확실한 건, 산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나는 원래 게으르고, 싫증을 잘 내며, 의지가 약해 무엇이든 쉽게 포기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산악부 활동을 위해 매주 주말 아침 7시에 눈을 뜨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다. 이 작은 변화 하나만으로도 산은 내 인생의 항로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사회의 시선으로 보자면, 산악부 활동은 참으로 '비효율적'이다. 따뜻한 방에 누워서 영화 한 편을 보는 안락함과 효율을 뒤로하고, 우리는 굳이 춥고, 덥고, 위험한 곳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만약 이 길이 아니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자신 있게 떠오르는 답이 없다. 이 비효율적인 길 위에서 나는 내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들을 얻었다. 자일 하나로 연결된 우리는 신뢰로 똘똘 뭉쳐 서로의 생명을 지킨다. 그 끈끈한 연대감 속에서 내 인생은 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다.

원정대에 처음 합류했을 때를 기억한다. 나이는 꽤 찼지만 산악부 신입생인 탓에 나는 '뭔가 애매한 중고 신입'이었다. 쟁쟁한 타 대학 산악부 대원들 사이에서 부족한 내 능력이 민폐가 될까 늘 마음 졸였다. 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4차 훈련까지 버텨낸 지금,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눈빛만 봐도 통하는 '진정한 팀'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남은 훈련은 더 혹독할 것이다. 하지만 12차 훈련까지 모두 마치고 난 뒤, 내가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기대된다. 스무 살 배낭 여행자 시절, 낯선 길 위에서 느꼈던 그 선명한 '살아 있음'의 감각. 나는 히말라야로 가는 훈련 과정에서 그 뜨거운 감각을 다시 마주하고 싶다. 우리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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