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봄, 관계의 싹을 틔우는 시간
'대화로 자신 대면… 성숙하게 만들어
'시작하는 계절, 만남 통해 새 삶 구상

내가 근무하는 학교 교문에서 교실까지 등교로를 따라 매화와 목련의 꽃망울이 막 움트고 있다.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교정을 산책하는 학생들을 보니, 길었던 겨울도 이제야 마침표를 찍은 듯하다. 그렇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온다. 그리고 봄을 맞는 일은 언제나 새삼스럽다. 마치 닫아 두었던 창이 어느 순간 스스로 열리고, 열린 창문으로 갓 피어난 매화 향기가 교실 안으로 그윽하게 들어오는 순간처럼.
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단순한 계절의 교체만이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가 다시 싹튼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관계 맺기는 '나 혼자'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대화와 타자의 중요성을 탐구했던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M. Bakhtin)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대화적(dialogic)"이라 말했다. 그에게 '나'는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는 "타자의 눈을 거치지 않고서는 나는 나 자신에게도 온전히 도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 없이 완성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나라는 존재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타자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를 변화시키는 기회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미처 몰랐던 과거의 나를 다시 대면하고 미래의 나를 새롭게 구상한다. 그 만남은 때로는 예기치 못한 충돌처럼 당혹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분명 생동하는 과정이다.
봄에 일어나는 관계 변화도 비슷하다. 우리는 겨울 동안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관점, 혼자만의 해석에 갇혔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화해진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 더 가벼운 얼굴로 서로를 마주한다. 대화는 부드러워지고, 말을 건네는 마음의 온도도 올라간다. 어떤 관계는 겨울 동안 잊힌 것처럼 보였지만, 봄이 되면 다시 연둣빛 새싹처럼 살아나기도 한다. 얼어붙어 있던 갈등이 조금씩 녹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은 타자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나를 재정립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타자는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의 고정된 틀을 흔들고, 재구성하게 만드는 능동적인 목소리이다. 관계 맺기란 상대를 길들이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대화를 통해 나를 다시 써 내려가는 일이다.
봄이 오면 우리는 종종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동네 헬스장은 북적이고, 여행 사이트의 검색량은 늘어난다. 집 안을 정리하겠다는 계획에 마음이 분주해진다. 그러나 올해는 그 계획의 목록에 '새로운 관계 맺기'라는 항목을 넣어보면 어떨까. 누군가에게 먼저 안부를 건네는 일, 오해가 있었던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는 일,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말을 조금 더 오래 들어주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작은 시도들은 나를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봄이 되면 매화나무가 왜 다시 꽃을 피우는지, 목련은 왜 저렇게 순백으로 활짝 피어서 화사한지 정확한 원리를 묻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아름다움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관계도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다.
올봄, 나는 타자를 향해 걸어가려 한다. 나와 다른 목소리를 가진 이들, 내가 미처 미뤄두었던 인연들, 그리고 아직 만나보지 못한 미래의 타자들. 그들과의 대면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래 얼어 있던 마음의 표면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새로운 목소리들이 내 삶에 스며들 것이다. 봄은 결국, 마음을 열고 타자와 관계 맺기에 그지없이 좋은 계절이다. 봄의 문턱에서 우리는 또다시 관계의 싹을 틔운다. 일단 만나야, 무엇이든 시작된다. 윤종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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