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아이돌에 지갑 열린다...K팝 신사업 된 '버추얼 IP' [엔터코노미]
이해정 기자 2026. 3. 17. 06:06
버추얼 아이돌은 디지털 기술로 만든 '가상' 존재지만, 이들을 소비하는 문화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실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강력한 팬덤 문화를 기반으로 버추얼 아이돌이 단편적인 홀로그램을 넘어 K팝 산업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단 버추얼 아이돌이란, 디지털 기술로 구현된 가상 캐릭터로 활동하는 IP(지식재산권)를 지칭한다. 실제로는 이른바 사람 '본체'가 존재하며, 이 퍼포머가 특수 슈트를 착용한 뒤 2D·3D 모델링과 모션 캡처 기술을 거쳐 우리가 접하는 아이돌이 완성된다.
얼핏 보면 실체를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아티스트에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기엔 이미 이들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이거나 데뷔를 준비 중인 버추얼 아이돌은 100여 팀으로 추정된다. 명확한 공식 집계는 없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팬층이 이미 일정 규모 이상 형성됐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과 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버추얼 아이돌은 어떻게 현실 속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첫째는 실력이다. 아이돌의 실력이라 하면 노래와 춤은 물론이고, 외모와 인성까지 포함한다. 버추얼 아이돌 역시 이러한 기준을 통과한 실재 인재들이 발탁돼 활동한다. 가상의 캐릭터로 보일 뿐 실제 멤버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기 때문에 퍼포먼스 역량은 필수다.

외모 관리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버추얼 캐릭터는 정교하게 설계된 이미지를 언제나 유지할 수 있어 흔히 이야기하는 '외모 비수기'가 없다. 스캔들이나 학교폭력 문제 같은 부정적인 개인사가 발생한 여지도 없다. 따라서 팬으로서는 이미지 훼손에 대한 리스크가 휴먼 IP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셈이다. 실제 부정적인 논란에 휩싸인 아이돌의 팬덤이 버추얼 그룹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팬덤의 결집력 역시 강점이다. 버추얼 아이돌 팬들은 자신들이 기존 팬덤과 다른 집단이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버추얼'이라는 특성이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는 일종의 공동 목표가 형성돼 있다. 이는 음원 스트리밍 참여나 자발적 홍보 등 적극적인 팬 활동으로 이어진다. 팬덤이 사실상 마케팅 역할을 수행하며 그룹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구조가 정착한 것이다.
제작자로서도 버추얼 아이돌은 매력적인 사업 모델로 꼽힌다. 무엇보다 5인조 그룹 플레이브라는 명확한 성공 사례가 있다. 플레이브는 데뷔 2년여 만에 초동 음반 판매량 100만장을 돌파했고, 버추얼 아티스트 최초로 고척 스카이돔 무대에 오르며 시장성을 입증했다. 이 그룹을 제작한 블래스트는 원래 방송 기술 개발을 기반으로 한 기업이었지만, 플레이브 데뷔 이후 엔터테인먼트 기술 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블래스트는 2024년 기준 매출 454억원, 영업이익 99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각각 297%, 22% 성장했다.
업계에서는 아직 이들의 뒤를 이을 '2세대 버추얼 그룹'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에 차세대 성공 사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제작사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투자 관점에서도 버추얼 아이돌은 휴먼 IP에 비해 연습생 기간이 짧고 유지 관리 비용이 상대적으로 덜 든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사업 모델로 평가된다. 스튜디오 대관과 기술 인력 확보 등 일부 제작 비용이 필요하지만, 일정한 인프라가 갖춰질 경우 비교적 빠르게 콘텐츠 제작이 가능하다.

캐릭터 IP라는 특성 덕분에 2차 사업 확장도 쉽다. 플레이브와 협업해 출시된 '플레이브 롯데 빼빼로' 2종은 매장 오픈 1시간 만에 준비된 물량의 약 90%가 판매됐고, 이틀 만에 전량 소진됐다. GS25도 플레이브 IP를 활용해 빵, 과자, 교통카드 등 다양한 협업 상품을 선보였다. 랜덤 씰과 포토카드 등 한정 굿즈를 함께 제공하면서 팬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했고, 일부 상품은 사전 예약 15분 만에 준비 수량이 모두 판매되기도 했다.
최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걸그룹 헌트릭스가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것도 시장 기대감을 키웠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에 열광하는 소비자가 존재한다면, 버추얼 아이돌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실제 헌트릭스는 뷰티, 식품, 의류 등 다양한 산업으로 IP를 확장하며 강력한 산업적, 경제적 파급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한계도 존재한다. 휴먼 IP와 달리 버추얼 아이돌의 팬덤은 애니메이션 팬덤과 아이돌 팬덤 사이에 위치해 타깃 설정이 쉽지 않다. 기술적 제약도 여전히 과제로 꼽힌다. 캐릭터의 동작이 어색해지거나 표정이 일그러지는 등 기술적 오류가 발생할 수 있어 구현할 수 있는 콘텐츠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
또 팬들이 선호하는 이상적인 멤버 구성이 이미 어느 정도 정형화돼 있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남성적인 멤버, 귀엽고 섬세한 멤버, 재치 있는 멤버 등 익숙한 조합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한된 모션과 이미지 속에서도 차별화된 캐릭터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작자들의 가장 큰 과제로 꼽힌다.
결국 버추얼 아이돌 산업의 성패는 기술과 콘텐츠, 그리고 팬덤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직은 시장이 초기 단계지만, 이미 성공 사례가 등장했고 자본과 제작 인력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버추얼 아이돌이 K팝 산업의 또 다른 축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해정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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