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리포트]소신인가 간섭인가…이창용이 한은에 남긴 것

이무영 제도혁신연구소 부소장 2026. 3. 17.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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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호 한국은행 4년 점검 ④끝]
[편집자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4년 임기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고물가·고환율·가계부채·정치 일정이 얽힌 지난 4년은 한국은행의 역할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시간이었다. 금리 결정의 타이밍은 적절했나. 자산운용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지는 않았나. 통화정책 외에 한국은행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충분했나. 동행미디어 시대는 이번 기획을 통해 이창용 총재 재임기의 공과를 점검하고, 변화한 환경 속에서 중앙은행이 수행해야 할 바람직한 역할을 조망한다.

오는 4월 20일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는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 /사진=뉴스1
2022년 4월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 출신의 이창용 총재가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이 겹친 복합 위기 속에서 한국은행으로 왔다. 시장은 그를 '한국의 버냉키'라 불렀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를 향한 평가는 둘로 갈린다. 위기를 진화한 거시경제 지휘자라는 찬사와, 통화정책의 경계를 넘어선 '미스터 오지랖'이라는 냉소다.


보수적 소통 문화를 깨다… 한국형 점도표의 탄생


이 총재 취임 초반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한국은행 특유의 폐쇄적 소통 관행을 정면으로 바꾼 데 있다. 모호한 수사로 시장의 눈치 게임을 유도하던 기존 한은의 소통 방식은 그의 취임과 함께 사라졌다.

대표적 변화는 한국형 점도표(Forward Guidance·선제적 금리 경로 안내) 방식의 도입이다. 2022년 11월부터 기자회견에서 금융통화위원들의 향후 금리 전망을 구두로 공개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공식 'K-점도표' 제도로 발전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2026년 2월 제시한 'K점도표'. 금통위원 6명이 각자 3개의 점으로 6개월 후 적정 기준금리 수준에 대한 전망을 표시한다. 대다수 위원의 점이 현 기준금리(2.50%) 수준에 집중된 가운데, 일부는 2.25%로의 추가 인하를 전망했다. /사진=한국은행
집값이 들썩일 조짐을 보이면 "집값이 잡히지 않으면 금리를 더 올릴 수 있다"고 직접 경고하는 방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임 총재들과는 다른 적극적 소통이었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일정한 효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발언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질수록 말과 실제 정책 결정 사이의 간극이 벌어진다는 지적도 함께 따라붙었다.


성역 없는 발언, 그러나 거센 반발


이 총재는 금리를 넘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차례로 공론화했다. 임기 중 가장 논쟁적인 국면이었다.

2024년 8월, 한은은 수도권 집값 폭등과 저출산의 근원에 왜곡된 입시 경쟁이 있다는 거시경제학적 진단 아래 상위권 대학의 '지역 비례 선발제' 도입을 공식 제안했다. 그러나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3개 대학 모두 "현실적으로 어렵다" "시기상조" 등을 이유로 부정적 입장을 밝혔고, 법학계 일부에서는 위헌 소지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외국인 돌봄 노동자 최저임금 차등 적용' 논의를 공론화했을 때도 양대노총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차별적·반인권적 발상"이라며 보고서 폐기와 총재 사과를 공개 요구했다.

거시경제학적 문제 진단의 방향성 자체에 일부 공감이 형성됐으나, 핵심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은 거셌다.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뒤로하고 정치·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함께 쏟아졌다. '미스터 오지랖'이라는 별명이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비상계엄·가계부채… 위기 앞에서 드러난 역할


위기 앞에서의 대응은 뚜렷했다. 2024년 12월 3일, 사상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로 금융시장이 동요하자, 최상목 부총리가 소집한 F4(기획재정부 장관·한국은행 총재·금융위원장·금감원장) 긴급회의에 즉각 참여해 "시장이 완전히 정상화될 때까지 유동성을 무제한으로 공급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함께 발신했다. 또한 계엄 당일 밤 F4 회의에서 최상목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려 하자, 이 총재가 이를 만류해 경제팀의 공백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12월 29일에는 최상목 권한대행이 무안 제주항공 참사 대응에 집중하느라 불참하자, 이 총재가 이례적으로 F4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는 이 총재 주재로 F4 회의가 열린 첫 사례로, 부총리 부재 시 한국은행 총재가 회의를 이끌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창용 총재는 F4 회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시장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계엄 다음날인 12월 4일, 한국은행은 환매조건부증권(RP) 무제한 매입을 결정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는 이 총재가 통화당국 수장으로서 내릴 수 있는 핵심 결정이었으며, 금융시장 패닉 방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은 올 1월 열린 F4 회의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 왼쪽부터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구윤철 부총리, 이억원 금융위원장. /사진=뉴시스
가계부채 문제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냈다. 정치권의 내수 부양 압박에도 긴축 기조를 유지하며, 이 총재 본인의 표현대로 "15년간 한 번도 꺾인 적 없던"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의 방향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다만 국제금융협회(IIF) 집계 기준 2024년 말 기준 91.7%로 캐나다에 이어 세계 2위라는 절대 수준은 여전하다.


"말은 창대했으나 칼자루가 없었다"… 권한의 한계


이 총재의 광폭 행보 이면에는 실행 수단의 부재라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교육 개혁, 노동 이민 정책 등 그가 공론화한 의제들은 모두 입법과 예산을 쥔 정부와 국회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한국은행에는 이를 직접 실행할 권한이 없었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 반복되는 제언은 점차 실효성 없는 발언으로 소비됐다.

통화정책 본연의 영역에서도 독립성 논란은 불거졌다. 2024년 하반기 기준금리 두 차례 인하 과정에서, 시장 일부에서는 기재부의 내수 부양 요구와 국토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계대출 급증)가 엇갈리는 상황 속에서 정작 금리 결정이 정치 변수에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구조개혁을 공개적으로 주창한 것과 실제 금리 결정 사이의 간극이 그 비판의 핵심이다.

이창용 총재의 임기는 중앙은행이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드러낸 4년이기도 했다. 한은법상 한국은행의 목적은 '물가 안정'이다. 그 틀 안에서 총재 개인이 공론화할 수 있는 의제의 범위는 넓어졌다. 그러나 실행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총재가 이 총재의 광폭 행보를 계승할지, 통화정책 본연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선회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 선택은 '중앙은행의 역할이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답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무영 제도혁신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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