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AI 판사가 미녀인 까닭


그가 공포를 직조하는 방식은 시간을 흘리는 남다른 태도에 기인해요. 공포가 꼭짓점을 향해 치달을수록 감정을 증폭시키는 배경음악을 오히려 싹 없애 버리고, 시간을 잘게 쪼개듯 다큐멘터리처럼 찬찬한 호흡을 가져가죠. 이 과정에서 공포는 밟지 않은 지뢰처럼 마음 한구석에 영원히 매설돼 있을 것만 같은 환장할 감각을 만들어내요. 이 미친 세상은 제정신으로는 살기 어려우므로 어쩌면 광인만이 진실을 직시한다는 게 그의 영화적 테마인데, 진짜로 살 떨리는 공포는 러닝타임이 45분에 불과하면서도 감독과의 대담(35분)을 이어 붙여 80분짜리 영화인 양 개봉함으로써 ‘왕과 사는 남자’와 똑같은 관람료를 받는다는 사실이죠.
[2] 이렇듯 토마호크 미사일보다 겁나는 게 인간의 미혹한 정신세계이다 보니, 인공지능(AI)을 다루는 영화의 메시지도 변하는 중이에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년)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터미네이터’(1984년)처럼 20세기 SF영화들은 AI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어요. 인간의 기술이 인간을 포식하는 ‘기술의 역습’ 관점에서죠.
그러나 큐브릭이 디스토피아의 시작점으로 콕 집은 ‘2001년’에는 오히려 AI를 휴머니티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가 탄생해요. 사실 이 영화는 AI를 다루는 전대미문의 관점은 아니에요. 1982년 스필버그 자신의 영화 ‘E.T.’를 서글프게 변주한 경우죠. 미지의 존재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비춤으로써 휴머니티를 상실해 가는 현대인을 거울처럼 비추는 일종의 메타 영화들이랄 수 있으니까요. ‘E.T.’와 ‘A.I.’, 제목도 비슷하죠?
AI를 다루는 요즘 영화들의 관심사는 정작 AI가 아니에요. AI를 말하는 척하면서 결국엔 인간을 열렬히 향하죠. AI 비서와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남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그녀’(2014년)의 영어 원제목이 왜 주어 ‘She’가 아닌 목적어 ‘Her’일까요. 결국 ‘AI란 신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바꿀까’가 아니라 ‘인간은 AI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방점이 찍혔다는 증거예요. 주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요.
[3] 이런 맥락에서 AI를 무척 창의적으로 다룬 영화 한 편을 최근 보았어요. 지난달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노 머시: 90분’이 그것이죠. 이 영화는 판사, 배심원, 사형 집행인까지 모두 AI 사법 시스템인 ‘머시(Mercy·자비)’로 대체된 2029년을 배경으로 해요. 주인공인 형사 ‘레이븐’(크리스 프랫)은 어느 날 AI 판사인 ‘매독스’가 주재하는 법정 의자에 꽁꽁 묶인 채 눈을 떠요. 그는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데, AI 판사는 주인공의 전화 통화 기록, 소셜미디어, 위치정보, 생체데이터, 폐쇄회로(CC)TV, 경찰의 보디캠 녹화 영상 등 디지털 기록을 모조리 털어 레이븐을 살인자로 지목했지요. 레이븐에게 주어진 시간은 90분. 레이븐은 AI 판사가 뒤졌던 디지털 정보들이 축적된 시립 클라우드에 한시적으로 접근할 권한을 부여받는데, 90분 안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즉시 사형이 집행된다는 속 시원한 설정이에요.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현실 법정과는 반대로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점이죠. AI 판사는 실수하지 않을 테니 피의자는 유죄가 디폴트값인 거죠.
결국 주인공이 무죄를 가까스로 입증해 내면서 무자비했던 AI 판사에게 자비라는 휴머니티의 핵심 가치를 깨우치게(아니 딥러닝하게) 만든다는 결말을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지만, 정작 제가 주목한 것은 AI 판사를 연기한 인물이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에 나왔던 스웨덴 미녀 배우 레베카 페르구손이라는 사실이었어요. 매혹적인 여배우를 등장시켜 관객의 눈을 붙잡아 두려는 할리우드 상술이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같은 남자가 아니라 이런 아리따운 여성이 AI 판사라면 주인공 레이븐이 무죄를 입증하지 못해 사형되더라도 조금은 덜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아마도 의자에 묶인 살인 사건 피의자가 여성이라면 AI 판사로는 원빈이 나오겠죠?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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