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다슬기국을 먹었나, 메밀묵을 먹었나 [서아람의 변호사 외전]

2026. 3. 1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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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엄흥도 음식 먹는 장면 등
‘왕사남’ 시나리오 표절 논란 일어
구체적 표현은 저작권 보호 대상
역사적 소재·클리셰는 독점 안돼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키오스크에서 티켓을 구매하는데, 양옆에 선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영화표를 사고 있었습니다. 삭막하게 얼어붙었던 한국 영화계에 몇 년 만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였습니다. 호랑이 CG가 어색하다느니 뭐니 하는 사소한 지적은, 영화가 허구임을 순간적으로 잊게 하는 배우들의 열연 앞에 깨끗이 잊혔습니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봤다는 뿌듯함과 함께, 극장을 나오는 내내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하면 관심이 폭발하고, 그러다 보면 잡음도 생기는 법입니다. 잘 나가는 작품일수록 피하기 어려운 ‘표절 논란’이 이번에도 등장했는데요. 현재는 고인이 된, 실제로 엄흥도의 후손으로 알려진 한 연극배우가 2000년대 집필했던 드라마 시나리오 ‘엄흥도’와 ‘왕과 사는 남자’ 영화가 매우 유사하다는 의혹을 유족 측이 제기한 것입니다.

서아람 변호사
가장 문제가 된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장면인데요. 자신을 복위시키려던 충신들의 잇따른 죽음과 유배에 ‘곧 따라가겠다’며 식음을 전폐했던 단종이,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진심이 담긴 밥상을 마침내 받아들이기로 하고, 음식을 입에 넣는 장면입니다. ‘다슬기국에 들어간 다슬기는 내가 잡아 왔다’고 강조하는 엄흥도 역 배우의 재치 있는 애드리브가 관객을 울면서 웃게 만들었는데요. 피폐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하루에 사과 한 알만 먹으면서 버텼던 단종 역 배우는 실제로 다슬기국을 한 숟갈 먹었을 때 온몸이 짜릿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편, 드라마 시나리오 ‘엄흥도’에도 엄흥도의 권유로 음식을 먹은 단종이 만족감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하는데요, 드라마 시나리오상의 음식은 메밀묵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엄흥도가 음식에 대한 단종의 반응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설정, 자결하려는 단종을 엄흥도가 구한다는 설정, 역사상으로는 다섯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단종의 궁녀가 한 명으로 줄어든 설정, 역사상으로는 세 명으로 알려진 엄흥도의 아들이 외아들로 줄어든 설정, 그 아들이 관아로 압송되는 설정도 일치한다는 게 유족 측 주장입니다. 이렇게만 들으면, 어라, 싶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저작권법에서는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저작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보호 범위입니다. 저작권법상 보호되는 대상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표현’, 그것도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가령 ‘재벌 3세와 말단 여사원의 계약연애’ 같은 콘셉트는 아이디어에 불과하여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어린 시절 이야기’, ‘서동요 전설’, ‘소현세자의 비극’ 같은 역사적 소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이러한 아이디어나 소재에 창작자가 자신의 개성과 노력으로 독특한 서사 구조, 장면 구성, 대사, 캐릭터 설정을 불어넣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다면 그때는 보호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저작권 침해 판단에서의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은 ‘장르적 클리셰’입니다. 예를 들어, 재벌 3세와 결혼하겠다는 신데렐라 여주인공에게 재벌가 사모님이 찾아와 돈봉투를 내미는 것은, 아무리 구체적인 장면이라고 해도 독창성이 없습니다. 특정한 장르나 소재의 작품에서는 ‘거의 반드시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전개나 장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김유신을 다룬다면 계백과의 대립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고, 왕건이 나온다면 견훤이 빠지면 서운합니다. 사도세자가 주인공이라면 뒤주에 갇혀 사흘 밤낮을 울부짖는 장면이 연상되죠. 즉, 유사한 구성이나 장면이 있더라도, 그것이 소재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거나 자연스럽게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독창적이거나 독점적인 것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피리 부는 사나이’가 표절 소송에 걸렸을 때, 법원은 ‘대형 사고에 책임이 있고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위해 각종 위법한 수단을 사용하는 경찰청장의 존재, 권력자들의 사건 은폐나 방송을 통한 여론조작 시도 같은 것은 해당 장르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설정이다’라는 내용을 판결문에 적기도 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의 청령포 유배, 영월 호장 엄흥도라는 인물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한 각종 설화와 기록에서, 금부도사가 사약을 차마 전하지 못해 단종을 수행하던 노비가 활줄로 단종의 목을 졸랐다거나, 활줄을 목에 걸고 밖에서 당기라고 단종이 지시했다거나, 엄흥도가 남몰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했다거나, 고을 사람들이 무덤 위치를 알고 ‘군왕묘’로 불렀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몰래 시신을 거두고 장사를 지낼 정도라면 유배지 사람들과 단종 사이에 어떤 친밀감이 생겼던 게 아닐까. 귀양 온 죄인과 일반 백성의 직접 접촉은 금지되었으니, 그들 사이의 매개체는 매일 바치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은 발상은 사뭇 자연스럽다는 뜻입니다. 여러 명의 인물을 작품 분량상 하나의 인물로 합치는 기법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법입니다.

문화 콘텐츠 산업에서 표절 논쟁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정작 표절로 인정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건 음모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형 제작자의 갑질’ 때문이 아니라 법원의 엄격한 판단기준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한 표현을 지나치게 보호하게 되면 그 또한 다른 창작자들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종이 다슬기국을 먹었을지 메밀묵을 먹었을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모처럼 등장한 명작이 억울한 오명을 쓰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서아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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