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속에 숨은 풍경…민화와 한글이 만든 새로운 ‘문자도’

권이선 2026. 3. 16.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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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눌러쓴 호랑이가 긴 담뱃대를 물고 느긋하게 앉아 있다.

둥글게 말린 호랑이의 몸은 글자의 형태를 따라 흐르고, 그 곁에는 꽃이 피고 작은 새가 내려앉는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 인사아트에서 18일 개막하는 나형민 작가의 초대전 'Beyond Letters: 문자를 입다'는 민화와 한글을 결합한 '한글 문자도'를 통해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새롭게 탐색하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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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눌러쓴 호랑이가 긴 담뱃대를 물고 느긋하게 앉아 있다. 둥글게 말린 호랑이의 몸은 글자의 형태를 따라 흐르고, 그 곁에는 꽃이 피고 작은 새가 내려앉는다. 글자는 더 이상 읽히는 기호가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 된다. 작품의 제목은 ‘Oops’. 뜻밖의 감탄사 같은 이 한 단어는 민화 속 익살스러운 호랑이처럼 화면 전체에 유머와 여유를 퍼뜨린다. 문자와 이미지, 장식과 의미가 뒤섞이며 글자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하나의 언어가 된다.

나형민, ‘Oops’. 갤러리 인사아트 제공
조선 후기 문자도의 전통이 동시대적 시각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 인사아트에서 18일 개막하는 나형민 작가의 초대전 ‘Beyond Letters: 문자를 입다’는 민화와 한글을 결합한 ‘한글 문자도’를 통해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새롭게 탐색하는 전시다. 조선 후기 민화의 대중성과 해학미, 한글의 기하학적 조형미는 하나의 시각 언어로 재구성되며 문자도는 읽히는 대상에서 경험되는 이미지로 확장된다.

문자도는 원래 충(忠)·효(孝) 같은 유교적 덕목을 한자로 표현하며 교훈을 전달하던 그림이었다. 글자를 장식적으로 구성해 집안에 걸어두던 일종의 상징 회화였다. 그러나 나형민의 문자도는 그 익숙한 틀을 벗어난다. 한자 대신 한글을 화면의 중심에 두고 문자 자체가 지닌 조형성과 리듬을 강조한다.

나형민, ‘아리랑’. 갤러리 인사아트 제공
작가는 그동안 문자도를 단순한 전통 회화 양식으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문자와 이미지, 언어와 조형의 관계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호랑이와 새, 꽃과 산수 같은 전통적 모티프들은 한글의 직선과 곡선, 비례와 균형에 스며들어 문자 자체를 하나의 장면으로 변모시킨다. 관람자는 글자를 읽기보다 먼저 화면을 바라보고,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문자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나형민, ‘대박’. 갤러리 인사아트 제공
이번 전시는 이러한 문자도의 확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문자도를 티셔츠라는 일상적 매체로 옮겨 ‘입는 문자도’라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 회화가 더 이상 벽에 걸린 채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신체 위에 놓이고 움직이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이미지로 변화하는 것이다. 관람자는 작품을 바라보는 존재를 넘어 그것을 입고 경험하는 주체로 전환된다. 이처럼 ‘문자를 입다’는 문자도를 과거의 회화 형식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동시대 매체와 결합한 확장 가능한 시각 체계로 제시하며, 읽는 문자에서 입는 문자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문자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나형민, ‘서울’. 갤러리 인사아트 제공
또한 전시는 문자도의 미래 가능성도 함께 제시한다. 나형민은 문자도를 생성형 인공지능과 결합하거나 다양한 매체로 확장하는 실험을 이어왔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한글 문자도를 넘어 영문 문자도로의 확장 가능성까지 암시한다. 문자와 이미지, 전통과 기술,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다. 전시는 23일까지.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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