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20대 여공들…60대 노동자로 살아남다

한겨레 2026. 3. 1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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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14화 44년 차 원풍동지회
역사탐방 프로그램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 하의도에서 ‘큰 바위 얼굴’로 불리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원풍동지회(2023년). 장남수 제공

낙엽처럼 전국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매년 가을, 같은 공간에 모인다. 각자의 삶으로 떠나긴 했으나 끝난 적 없는 우리, 흰머리는 성성해도 그날의 눈빛은 변함없다.

제일 좋은 옷을 골라 단장을 한 후 기차와 비행기 시외버스 지하철을 타고 소풍 가는 아이처럼 부풀어 서울 영등포역에 내린다. 안고 온 마음들은 노란 손수건 매달듯이 한장 한장 곱게 펴 가지마다 엮는다. 170여명의 회원들이 2025년 43년 차 모임을 했고 올해는 마흔네번째 총회를 하게 된다. 해를 넘기는 동안 한둘, 별이 된 빈자리도 생겨 쉰번? 쉰다섯번? 마지막 잎새 질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 같다.

모임 날짜가 정해지면 한달 전쯤 나는 서울행 항공권을, 광주 부산 장성 정읍 전주 강릉에 사는 동료들은 열차표를 예매한다. 자꾸 날씨를 검색하고 안고 갈 이야기를 그리다가 전날 밤은 잠을 설친 채 꼭두새벽부터 세수하고 시계를 흘끔거린다. 전체 모임 시간은 오후 2시여도 부서별로 일찌감치 모여 점심을 먹으며 회비를 모으고 야유회 날을 잡느라 수다를 떤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행사나 집회 참석으로 서로 가끔 보는지라 먼 지방에 사는 이들은 더 반갑다.

섬유직물공장 원풍모방에서 1970년대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었던 원풍모방노동조합은 전두환 정권이 관계기관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면서 1982년 가을 해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굴욕적인 각서를 거부한 560명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당시의 권력자는 이것도 모자라 격리해야 할 불온한 집단 취급하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전국의 공단에 배포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 논란이 되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원조는 1970년대 노동자들의 생존권 박탈 문서였던 셈이다.

가는 공장마다 ‘원풍모방 출신’이 드러나면 잘리니 숨을 죽여야 했다. 부당한 처우에 항의한 사람들은 관리자의 서랍 안에 있던 명단으로 신상 조회가 이루어졌다. 2차, 3차 해고 이력이 쌓였고 점점 먼 곳, 관리가 덜 미치는 영세한 일을 찾아 전국 곳곳으로 흩어져 갔다. 벼랑 끝에 밀려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다가 그마저 정보과 형사가 찾아오는 바람에 ‘빨갱이 며느리’로 몰려 아이를 떼놓고 이혼해야 한 이도 있고, 취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있다가 친인척 등쌀에 “결혼해 버린” 이도 있었다. 공장에서 일을 해 남자 형제들 학비를 댔으나 성공한 이후 외면당하는 아픔을 겪은 이도 있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오랫동안 원풍 동지들과 단절한 이도 여럿이었다.

생존을 자르는 칼날 위에서 간난신고로 살아남은 회원들은 지금도 모임을 주말에 잡아야만 할 정도로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청춘에 만나 노인이 된 얼굴들은 그저 서로가 대견하고 고맙다. 한결같이 “원풍노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이 모임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 입을 모은다.

초등학교, 잘해야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애뿐만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은 동지애 덕이다. 역사의 중심에서는 소외될지언정 민주화 운동의 장에서 묵묵히 손잡고 걸어온 자부심도 있다.

다행히 원풍동지회는 노조가 해체되기 전 뜻있는 조합원들의 기금으로 마련한 작은 공간이 있었다. 이곳은 훗날 민주화 운동의 장에서 주요한 몫을 하기도 했다. 원풍 노조 사람들은 ‘원풍의 집’에서 매달 펜으로 꾹꾹 눌러쓴 ‘원풍회보’를 만들어 발송하고 번갈아 실무를 담당하며 전국에 흩어진 동료들을 이어왔다. 1980년대 후반엔 남편을 대동하던 동료들이 조금 지나자 조롱조롱 아이들을 안고 왔다. 사무실 옆의 작은 방은 일일 유치원이 되었다. 다과를 준비하는 임원진은 아이들 먹거리를 빠트리지 않았고 지부장은 아이들 용돈 주느라 주머니를 비우고는 벙글거렸다. 아이들도 앵두 같은 입으로 “지부장님” “조합장님”이라 부르고 그 외는 “이모”들이었다.

‘원풍회보 19호’ 표지

부모를 따라 모임에 오던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2012년 겨울, 백담사 아래 만해마을에서 모였다. 참석한 자녀는 30여명, 나를 비롯하여 몇명의 어른들이 함께했다. 서로 아는 얼굴도 있고 낯설어 서먹하던 얼굴도 있었으나 이틀을 같이 보내는 동안 놀랍게 친숙해졌다. 세미나실에 모여 앉아 지금 제 나이보다 더 어리거나 비슷한 스무살 무렵의 엄마들이 질질 끌려 경찰차에 실리거나 좁은 기계 틈에 누에처럼 엉켜 농성하는 영상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엄마에게 듣긴 했으나 이 정도까지는 몰랐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숙연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팀을 나누어 진지하게 토론하던 아들딸들은 이 모임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명칭은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되었다. 밤을 새우며 이야기하고 게임도 하며 놀다 다음날 아침 길게 줄을 지어 백담사 길 산책에 나섰다. 차량 출입이 통제된 7㎞의 눈길을 걸어 한때 전두환이 기거한 사찰에 도착하니 하얀 눈에 덮여 있었다. 그의 폭압으로 고통받은 사람들과 그 자식들이 눈을 뭉치고 돌탑을 쌓았다.

이후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부모들의 ‘전설’을 영상으로 만들기도 하고 원풍동지회 총회 때면 안내를 맡거나 축사도 했다. 성악가인 자녀는 축가를 부르고 역사를 전공하는 자녀는 부모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사회복지, 교직, 언론, 전문직 등 각 분야의 소질을 발휘해 부모의 삶을 보듬어 주었다. 어느새 허물없이 지내는 자녀들을 엄마들은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태중에서부터 친밀감을 내장했을 이 모임에서 몇쌍의 연인이 탄생해 원풍 노조 사람들끼리 사돈도 맺었다. 결혼식장이 와글와글 벙글벙글했다.

‘원풍회보 합본’ 표지

원풍동지회는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가들이 결성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에서 활동하다 1993년 노협이 발전적 해소를 결정한 뒤 그 회원들과 함께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모임’을 결성해 활동했다. 중년을 넘기며 차츰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면서 좀 더 사회적인 활동을 하자는 논의로 발전했고 각 부서가 연중 활동 표를 짰다. 매해 한두차례 단체 야유회나 그룹별로 하던 여행을 유지하며 노인요양원이나 장애인 복지기관, 역사 탐방, 후배 노동자 지원 활동을 병행했다. 내가 속한 직포과 사람들은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시작했다. 열다섯의 중학생, 열일곱살 고등학생, 아이를 가진 임산부, 스무살의 공장 노동자…. 권력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들의 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다음해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하고, 쉼터 ‘와락’의 김장 날에 맞춰 고무장갑을 들고 모였다. 세월호 유족에게 위로를 전하기도 하고 재능교육과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는 동시에 나라가 불안할 때마다 광장에 모여 불 밝히며 세월의 나이테를 만들어 왔다.

나아가 “지식층의 시선과 펜 끝이 아닌, 우리 역사 우리가 기록하자”고 결의하면서 자료를 정리해 몇권의 책을 출판했다.

1988년에 출간한 ‘민주노조 10년’을 증보한 ‘원풍모방노동운동사’, 몇명의 생애사를 엮은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과 126명의 증언을 담은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가 나왔다.

외부 작가의 도움도 받고 내부에서 역할을 분담해 기록하기도 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자료와 소송 자료도 묶었다. 사진집으로도 제작하고 시디(CD)에도 담아 한부는 민주화운동기념사료관에 기증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못한 아쉬움은 있다.

‘공순이’로 만나 동지가 된 우리는 그날을 각인한 가을이 되면 더욱 명료해진다. 지나온 시간의 가치와 남은 계절에도 우리가 또 지켜가야 하는 것들이.

석양에 날개를 편다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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