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여성숙 목포의원 원장, 남도의 척박한 땅 위에 ‘공동체 돌봄’ 아로새기다

목포=정해선 기자 2026. 3. 16.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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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108세 별세…깊은 발자취 조명
일평생 목포·무안 결핵 치료에 헌신
사재 털어 세운 한산촌…자립 도와
60년前 의료·요양·돌봄 통합 제공
군사독재 시절 민주 인사들 피난처
16일 108세 나이로 타계한 고(故) 여성숙 목포의원 원장.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제공>
이재명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통합돌봄’ 제도가 오는 27일 전국 시행을 앞두고, 60여년 전 목포와 무안의 척박한 땅에서 통합돌봄을 시행한 여의사의 숭고했던 삶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은 1962년 목포에 목포의원을 개원하고 이후 무안 삼향읍 ‘한산촌’을 건립·운영했던 고(故) 여성숙(108) 원장으로, 고인은 16일 오전 11시58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통합돌봄은 환자가 대형 병원이나 외딴 요양시설에 입소하는 대신, 본인이 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과 지역사회 안에서 의료와 요양, 돌봄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받는 맞춤형 복지 정책으로, 황해도 출신의 여성 흉곽내과 전문의이자 결핵 전문의였던 고인은 남도 땅에 ‘지역 의료’와 ‘공동체 돌봄’의 위대한 역사를 아로새긴 선구자였다.

고인은 국가마저 난치병 치료나 사회복지에 대한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속수무책이던 시절, 평생을 독신으로 헌신하며 전염병의 공포에 떨던 결핵 환자들을 무료 또는 헐값에 치료했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 의사의 꿈을 품다

자서전 ‘꿈의 주머니를 별에다 달아매고’에 고스란히 묘사된 고인의 유년 시절은 그야말로 처절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1918년 일제강점기 황해도 송화군 진풍면 덕안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제대로 된 우물조차 없어 고인 웅덩이 물을 식수로 써야 할 만큼 극심한 궁핍을 견뎌야 했다.

열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칭얼대는 동생을 낡은 포대기로 등에 업은 채, 매캐한 먼지가 날리는 솜틀집 일을 거들며 밥벌이에 나서야하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고인은 결코 운명에 주저앉거나 순응하지 않았다.

이후 1935년 열일곱살이 되던 해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해준 혼인을 거부하고 평양으로 떠난 고인은 남의 집살이와 식모 노릇으로 학비를 벌어 악착같이 공부를 이어갔다.

◇전쟁의 상흔 목도…‘살리는 의사’ 결심

1937년 원산 마르다 윌슨 신학원에 입학해 1941년 졸업장을 받고, 이후 1944년까지 일본 교아이(共愛) 여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고인은 1945년 5월 서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에 당당히 입학했다.

하지만 1950년 한반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방위군 의무관으로 참여한 고인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 죽어가는 병사와 피난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두눈으로 목도했다.

전쟁이 남긴 이 참혹한 상흔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살리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굳게 했다.

이후 1952년 3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전주 예수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마친 고인은 여수 애양원과 광주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을 차례로 방문하며 일생일대의 기로에 섰다.

당시 한센병 역시 철저히 소외된 질병이었으나, 결핵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치명적으로 민중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정부의 방역 대책조차 전무했던 결핵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가난의 악순환’을 만드는 사회적 재난이었다.

1954년 8월 광주제중병원 의사로 부임한 고인은 가장 처참한 의료 현장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고, 피고름이 찬 중증 폐결핵 환자들의 늑막천자 시술을 도맡으며 위태로운 생명의 끈을 사력으로 붙들었다.

가망이 없어 이른바 ‘저승 길목방’이라 불리던 격리 독방에 버려진 채 하염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다가간 고인은 그들의 손을 꽉 맞잡으며, 벼랑 끝에 선 이들이 적어도 외롭게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지역사회 안에서 끝까지 곁을 지키는 ‘진정한 돌봄’의 실천자가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가난한 기침 환자들의 보호소 ‘목포의원’

1961년 12월 치열했던 광주 생활을 뒤로한 고인은 이듬해 1월 항구도시 목포에 ‘목포의원’ 간판을 걸고 진료에 나섰다.

당초 잠시 머물며 의료 봉사를 할 요량이었으나, 의료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던 목포와 무안은 결국 그가 평생 닻을 내리고 지역 의료의 최전선을 지킬 제2의 고향이 됐다.

당시 목포의원은 의원이라기보다 빈민 구호소에 가까웠다. 하루 외래 환자만 수백명에 달했고, 신안의 외딴섬과 척박한 어촌에서 배를 타고 찾아온 가난한 기침 환자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밤낮없이 무료 진료를 펼쳤고, 거동이 불편한 중증 환자를 위해 험한 골목길을 직접 누비며 가정 방문 돌봄까지 병행했다.

당시 서민에게 결핵은 곧 생계 단절이었다. 기력이 쇠해 쓰러질 몰골을 하고도 “당장 처자식 먹여 살리러 바다로 나가야 한다”며 울부짖는 환자들을 보며, 고인은 결핵약 처방과 함께 ▲일정 기간 절대 안정 ▲영양 공급 ▲규칙적인 약 복용 ▲가족 내 전염 예방 등을 거듭 강조했다.

당시 항결핵제가 보급되기 전이라 병의 진행을 늦추는 것조차 기적에 가깝던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밤낮으로 병실과 판잣집으로 내달리며 지역 사회의 붕괴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고인 헌신 덕에 목포의원은 결핵 치료의 중심이 됐고, 사람들은 그를 ‘결핵 환자들의 어머니’라 불렀다.

◇결핵환자의 자립 공동체 ‘한신촌’

목포의원에서 밤낮없이 환자를 돌보던 고인은 곧 깊은 한계와 고민에 직면했다.

병세가 안정돼 퇴원하더라도, 생계를 위해 또다시 고된 일을 하다보면 십중팔구 병이 재발해 다시 실려 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의료와 복지의 단절’을 관통하는 문제점이었다.

그는 환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단순한 알약이 아니라, 깨끗한 환경에서 마음 편히 일하며 인간다운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삶의 터전’임을 깨달았다.

마침내 1965년 8월15일 고인은 전 재산을 털어 목포에서 약 10㎞ 떨어진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의 척박한 땅을 매입해 결핵환자 자립 공동체 ‘한산촌’을 세웠다.
1965년대 한산촌 초기 설립 과정에 참여한 요양 환우들이 휴식을 가지며 환하게 웃고 있다.

자신의 비좁은 방에서 폐결핵 환자 몇명을 돌보던 작은 연민이, 갈 곳 없는 환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처로 확장된 것이다.
한산촌은 환자들을 세상과 단절시켜 산속에 수용하는 단순한 격리 시설이 아닌, 체력에 맞게 텃밭을 일구고 일거리를 나누며 경제적 자립을 돕는 생산 공동체이자,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치료와 사회적 재활을 병행하는 치유의 터전이었다.
한산촌 요양 결핵 환우들이 1㎞ 이상 거리의 버스종점에서 시장 물건을 손수레에 싣고 한산촌으로 돌아가고 있다.

세상의 잔인한 낙인에 상처받았던 이들은 한산촌이라는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자존감을 되찾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단순한 시혜적 자선이 아닌 ‘함께 사는 방식’을 증명해 낸 이곳은, 의료와 복지가 완벽하게 결합된 ‘지역형 통합돌봄’의 모델이었다.

◇‘디아코니아 정신’…공동체 돌봄 확장

고인의 일생에 걸친 초인적인 헌신은, 단순히 직업적 투철함을 뛰어넘어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디아코니아(섬김) 정신’에 굳건히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80년 5월 한산촌에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본부가 정식으로 창립되면서 그의 사역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거대한 지역 공동체적 돌봄 운동으로 확장됐다.
1980년대 고(故) 여성숙 목포의원 원장(앞줄 왼쪽서 4번째)과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관계자들이 종신서약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고인은 한산촌 요양소 건물의 상당 부분을 자매회에 내주었고, 이후 전 재산을 기증하며 공동체 돌봄이 지역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관청의 부당한 행정적 압박이 수시로 목을 조여왔지만 그는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 의료는 부와 명예를 쌓기 위한 직업이 아닌, 환자의 두려움과 사무치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짊어지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한밤중 객혈로 피를 쏟는 청년의 손을 맨손으로 꽉 붙잡고, 세상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앞에서도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평생 독신으로 가난한 지역 환자들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결핵 환자들이 혐오의 대상이 돼 헤매던 시대, 그의 디아코니아 정신은 설교가 아니라 피 묻은 가운을 입은 채 환자들과 부대끼며 살아낸 통합돌봄의 일상 자체로 완벽하게 기억됐다.

◇시대의 그늘 아래, 피난처가 된 한산촌

고인의 무한한 포용력과 한산촌이라는 공동체의 특수성은 역설적이게도 이곳을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사의 숨겨진 비밀 성소로 만들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억압적인 군사정권 시절, 국가 권력의 무자비한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던 수많은 민주 인사들에게 외지고 소외된 지역의 한산촌은 뜻밖에 가장 완벽한 피난처가 됐다.

당시 결핵에 대한 대중적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기에 일반인과 수사기관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일종의 방역 치외법권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함석헌, 안병무, 황석영, 김지하, 홍성담, 윤한봉, 김남주, 윤영규 등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한산촌으로 스며들어 깊은 숨을 고르곤 했다.

고인이 처음부터 한산촌을 정치적 은신처로 내준 것은 아니였다. 그는 살려달라며 문을 두드리는 이가 환자든, 쫓기는 민주 투사든 조건 없이 따뜻한 밥과 돌봄의 공간을 내어주었다.

한산촌은 그렇게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따뜻한 지역 병원이면서, 동시에 암울한 시대를 꿋꿋하게 견뎌내는 거대한 돌봄의 공동체이자 ‘보호막’이 됐다.

◇한 사람의 선택이 지역을 살리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수도권 일극 집중으로 인한 참혹한 지방 소멸, 필수 지역 의료의 붕괴, 그리고 초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통합돌봄 체계 구축이라는 막중한 국가적 난제 앞에 서 있다.

고인의 백년 삶은 이 혼란스러운 현시대를 향해 매우 날카롭고도 묵직한 시대적 질문을 던진다.

엘리트 의사였던 그가 왜 서울을 마다하고 의료 인프라가 전무했던 척박한 목포와 무안을 평생의 헌신지로 선택했는가.

한명의 최고급 전문 인력이 남긴 헌신이 어떻게 지역 사회의 가장 튼튼한 안전망이 돼 인구 유출 속에서도 사람을 머물게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중력이 됐는가.

진정으로 지역 의료를 살리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힘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거대한 콘크리트 인프라가 아니라, 이웃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내 삶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의 헌신과 유기적인 통합돌봄 시스템에 있음을 고인의 삶이 생생하게 웅변하고 있다.

◇위로와 돌봄의 동반자…108세 일기로 영면

오랜 세월 그와 동고동락해 온 이영숙 전 디아코니아 노인요양원장은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는 1980년부터 고인이 사재를 털어 고군분투하던 요양원을 돕기 시작해 1983년 이를 인수했다”며 “1990년 한산촌 폐촌 이후에도 1986년 개원한 여수 돌산 큰삶(한삶의 집)을 통해 고인의 뜻을 이어 환자들과 생활하며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진정한 돌봄의 동반자로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이어 “고인은 원장이라는 권위적인 직함을 내려놓고, 그 흔한 마스크조차 쓰지 않은 맨얼굴로 환자들 틈에 섞여 차를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셨다”며 “환자들의 고된 밭일에도 서슴없이 나서 잡초를 뽑고 일손을 거들며 지역 사회 안에서 끊임없는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끝으로 “때로는 아픈 마음으로 책망도 했지만, 회진은 엄마나 누나처럼 따뜻하게 이뤄졌다”며 “잔디밭이나 나무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환자들을 만나며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1998년 10월 80세의 고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포의원의 문을 닫고 40년이 넘는 긴 지역 의료 봉사 여정을 조용히 마무리한 고인.

그는 2019년 3월부터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궈낸 무안 한산촌 옛터에 세워진 디아코니아 노인요양원 경내 자택에 기거하다 108세의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빈소는 목포 효사랑장례식장 402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18일이다.

/목포=정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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