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오른 주총,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 안착할 3가지 조건

한겨레 2026. 3. 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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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리포트 - 여의도에서 보는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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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총회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번 주총은 한국 자본시장의 중대한 분기점이다. 2025년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명문화되었고, 이어지는 세 차례의 상법 개정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의 근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총은 개정된 법리가 실제 경영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첫 번째 시험대다. 법률 개정의 취지에 발맞춰 실질적인 관행의 정착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주주총회에 많은 주주가 참여하게 하여 주총을 소통의 축제로 만드는 것. 둘째, 공시 제도를 통해 이사회의 결정 과정과 논의 내용을 주주가 알 수 있게 하는 것. 셋째, 권익 침해 시 이를 신속히 구제할 민사적 절차인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이다.

첫째, 주총이 명실상부한 기업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제도적 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 주주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주총은 대주주의 독단을 정당화하는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과거 한국의 주주총회는 이른바 ‘거수기 주총’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자주총의 도입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주주들이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핵심 수단이다. 그러나 참여하려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주가 안건을 직접 제안하는 ‘주주제안권’이나 부당한 경영진에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의 문턱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SEC Rule 14a-8’에 따라 시가 2000달러(약 260만 원) 이상의 지분을 3년 이상 보유하는 등 금액 기준으로 요건을 설정해 소액주주의 참여를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주주제안권 요건으로 발행주식 총수의 3%(자본금 1000억 원 이상 상장사는 1%)라는 높은 지분율을 요구해 사실상 개인 주주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주주대표소송 역시 미국은 단 1주만 보유해도 제소가 가능한 경우가 많지만, 한국은 상장사 기준 0.01% 이상의 지분과 6개월의 보유 기간을 요구해 주주권 행사를 제약한다. 이러한 진입 장벽의 완화 없이는 주주 참여 확대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우려가 크다. 궁극적으로 주주총회는 이사회와 주주가 회사의 미래를 논하는 소통의 장이자 축제가 되어야 한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가 매년 개최하는 주주총회는 ‘자본주의의 우드스탁’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축제다. 이들은 단순히 안건을 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4~6시간에 걸친 마라톤 질의·응답을 통해 주주들의 의구심을 해소하고 경영 철학을 직접 공유하며 주주를 진정한 ‘동업자(Partner)’로 대우한다. 우리 주총도 경영진이 질문을 회피하며 20~30분 만에 끝내는 형식적인 요식행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주주가 이사회의 자원 배분 전략을 경청하고, 경영진은 주주의 목소리를 중장기 경영 전략에 반영하는 명실상부한 거버넌스의 핵심 자리가 될 때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 개선은 시작될 것이다.

지난해 8월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집중투표제 도입 의무화, 분리 선출 감사위원 확대 등을 담은 상법 개정안이 여당 주도로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둘째, 주주 참여 확보와 함께 주주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하고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는 공시제도의 개혁이 요구된다. 현재의 공시 시스템은 결정된 결과만을 통보하는 데 치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사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제대로 이행하는지 시장에서 검증하려면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과 논리’가 공개되어야 한다. 그 논리의 중심에 ‘자본비용(Cost of Capital)’이 있다. 자본비용은 기업 투자에 사용된 자본의 기회비용이다. 기업의 자본비용이 6%인데 예상 수익률이 5%인 프로젝트에 투자한다면, 이는 주주의 자산을 갉아먹는 행위와 다름없다. 일본의 사례는 이러한 공시의 힘을 잘 보여준다. 2023년 도쿄증권거래소는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배 미만인 기업들을 대상으로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실천 방안을 마련해 공시하도록 했다. PBR 1배를 하회한다는 것은 시장이 해당 기업의 수익성(ROE)이 자본비용보다 낮다고 판단하는 신호다. 이 요구 이후 일본 기업들은 앞다투어 자본 효율성 개선 대책을 내놓았고, 이는 일본 증시의 비약적인 상승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단순한 사실 공시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업이 어떤 기준으로 투자와 배당을 결정했는지, 그 과정에서 산출된 자본비용은 얼마인지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내야 한다. 자본비용보다 낮은 수익률이 예상되는 곳에 투자하겠다는 경영자는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저버린 것이며, 시장은 공시를 통해 이러한 무능을 즉각적으로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 공시는 규제가 아니라 기업과 주주가 소통하는 투명한 시장의 언어다.

자본비용을 핵심 지표로 주주가 경영을 판단하게 될 때, 주주권 강화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주주들이 단기적 이익에만 집착하여 미래 투자나 회사의 성장 동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이사회가 배당 가능 이익 중 일부를 성장 동력을 위한 투자 재원으로 적립하는 것을 주총에서 승인받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 예컨대 해외 투자 및 신사업 투자를 위한 임의 적립금으로 수조원을 적립한 상장회사를 가정해 보자. 이 적립금 또한 자본비용이며 기간에 따른 비용이 누적되므로, 이를 상쇄할 수 있는 투자 계획을 주주와의 소통을 통해 제시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주주와 그 위임을 받은 이사회는 회사 자원의 중장기 자본 배치 계획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단기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주주 중심 기업으로 꼽히는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가 단기주의에 빠져 성장 동력을 잃었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버핏은 주주들을 파트너로 대우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이익을 재투자하여 ‘복리의 마법’을 실현했다. 우리 주총에서도 회사의 장단기 자본 배치에 관한 논의가 소통이 필요한 중요 안건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지난 2020년 3월18일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셋째, 참여가 확대되고 공시가 투명해져도 주주의 권익이 침해되는 경우, 이를 회복하는 제도, 즉 증거개시(Discovery)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 우리 자본시장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주주들이 이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제기하는 민사소송에서 증거를 확보하기가 극도로 어렵다는 점이다. 민사소송에서 원고가 입증 책임을 지는데, 기업 경영에 관한 증거는 모두 회사 내부에 있다. 주주가 이사의 배임이나 충실의무 위반을 주장하려 해도 이사회 회의록이나 내부 보고서에 접근할 권한이 제한적이다 보니 소송 승소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회사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숨기기 마련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 개시 단계에서 양측이 재판에 사용할 자료를 폭넓게 공개하도록 강제한다. 만약 고의로 증거를 숨기거나 훼손하면 재판에서 즉각 패소하거나 중한 형사 처벌을 받도록 해 ‘숨기면 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여 공정한 재판의 기반을 제공하며, 사실관계가 조기에 드러남에 따라 신속한 합의와 권리 구제를 가능하게 한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단순히 소송 기술이 우월한 쪽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따른 판결을 이끌어내고 빠른 권리 구제를 촉진하는 제도다. 민사적 책임 추궁이 활성화되면 국가나 공공이 기업 경영에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없어진다. 시장의 문제는 시장 참여자들 간의 공정한 다툼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세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은 한국 자본시장이 선진 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마련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주가 상승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실적이라는 충분조건이 뒤따라야 하며, 무엇보다 시장 참여자들이 변화된 제도를 신뢰하고 그에 걸맞은 관행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번 주주총회는 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무대다. 많은 주주가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이사회가 자본비용을 근거로 투명하게 주주를 설득하며, 권익 침해 시 디스커버리 제도와 같은 민사적 수단으로 권리를 구제받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상법 개정 이후 자본시장법, 민사소송법, 상속세법 등 후속 법안의 정비는 이러한 변화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시장의 일은 시장이 가장 잘 안다. 국가의 간섭보다는 민사적 책임과 시장의 감시가 작동할 때 기업은 진정으로 건강해진다. 이번 주총에서 보여줄 한국 기업들의 거버넌스 혁신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우리 증시가 새로운 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한국 자본시장의 선진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으며, 그 성공 여부는 이번 주총에서 드러날 이사회와 주주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이용우 전 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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