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도전 막는 '3대 허들' … 동종업종 제한·쥐꼬리 지원·꽉막힌 돈줄

2000년대 초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때 연 매출 80억원이 넘는 콘텐츠 회사를 이끌었던 A씨는 "폐업 후 금융 문턱이 매우 높아지는 현실을 경험했다"며 "2014년 첫 사업을 정리한 후 2~3년 동안은 은행 대출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회상했다. '실패자'라는 꼬리표는 대출을 다 갚고 나서도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A씨는 "재창업 자금을 마련하려고 해도 과거 부도 이력 하나만으로 대출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정부 보증기관에서도 재창업자에겐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16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실패한 창업가들은 한결같이 "모두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그렇게 했다가 폐업하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길은 현격하게 좁아진다"며 자기자금 창업·사실상 연대보증·재창업 정부 지원 소외를 재창업 주요 허들로 꼽았다.
해외에선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거액의 투자를 유치해 창업한다. 투자 생태계가 아직 그만큼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내 돈'이 있어야 한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해 발표한 '2023년 창업기업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창업자들의 자금 주요 조달처는 자기자금(95.2%·복수 응답) 혹은 금융기관 대출(28.3%)이다. 평균 창업 자금은 2억600만원에 달하는데 정부 융자·보증을 통해 조달한다는 응답은 8.4%, 엔젤·벤처캐피털 투자는 0.4%에 그친다. 창업 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자금 확보 어려움(53.7%)을 꼽은 배경이다.

자기자금 창업은 이익도 크지만 위험도 크다. 기업의 폐업이 곧 개인 인생의 파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번 폐업과 재창업을 반복한 B씨는 "폐업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타고 있는 중형차까지 처분해야 한 적도 있었다"며 "재창업할 때도 돈을 구하지 못해 개인신용대출 1억원과 주택담보대출 2억원을 받아 벼랑 끝에서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40대 이상 중장년층 창업 기업 비중이 전체의 71.9%에 달하는 등 대부분 창업 자금이 다니던 기업을 나오고 받은 퇴직금에서 나오는 현실을 고려하면 실패는 '하면 안 되는 것'이 된다. 또 한 번은 꿈을 좇아 할 수 있어도 막대한 사업 자금을 다시 벌어야 되기 때문에 난도가 확 올라간다. A씨도 2014년 폐업 후 일반 회사에서 근무하며 돈을 모아 10년 가까이 지난 2023년에야 재창업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없어졌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는 '사실상 연대보증'도 재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을 비롯한 금융 공공기관이 법인 대표자에게 연대보증을 요구하는 관행은 2018년 폐지됐지만 책임경영이행약정 혹은 투명경영이행약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지속되고 있다. 보증대출 시 대표자에게 약정을 체결하도록 하는데 보증기관이 보고 누락과 기타 투명경영 및 신의성실원칙을 위반하는 행위 등을 비롯해 사소한 위반 사항이라도 찾아내 대표를 상대로 연대보증금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지역신용보증재단이 기업 대표에게 책임경영 의무 준수 여부에 대한 소명 자료 제출을 요청했으나, 제출하지 않자 이를 약정 위반으로 보고 1억여 원의 연대보증금 지급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한 게 대표적이다. 법원은 소명서 미제출을 책임경영 의무 위반으로 보고 과도한 연대보증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약관법 위반이라며 지역신용보증재단의 청구를 기각했다.
또 약정 위반 사항이 있다면 상환에 실패한 기업의 '관련인'으로 신용정보망에 등록돼 신용카드 발급 거부 등 금융거래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폐업 경험이 있는 C씨는 "못 갚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연대보증이 있는 것과 똑같다"며 "장사를 하려면 경차라도 있어야 하는데 차부터 시작해서 다 압류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는 "폐업하면 갈 수 있는 곳은 물류센터 아니면 공사장뿐"이라고 덧붙였다.
신규 창업자 위주 창업 지원 정책도 재창업에 걸림돌이다. 우리나라 창업 생태계 특성상 초기 창업 과정에서 정부 지원금이 큰 역할을 하는데 대부분 신규 창업자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현재 동종 업종으로 재창업하는 경우 폐업한 날부터 3년(부도·파산으로 폐업한 경우 2년) 이내에 사업을 개시하면 '창업'으로 인정받지 못해 정부 창업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데 대부분 지장이 생긴다. 2026년 정부 창업 지원 예산 3조4645억원 중 재창업 관련 항목은 재도전성공패키지·재창업 자금 융자 등으로 3% 수준이다.
지난해 법 개정으로 성실경영실패 기업인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나 신기술 채용 등 우수한 재기 역량을 보여주면 동종 업종으로 재창업해도 바로 창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현장에선 아직 체감하기 힘들다는 평가다. 재기 역량이 우수하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 위반 여부·실패 원인 분석·사업성 평가 등을 거쳐야 한다. 제조업 창업가 D씨는 "재창업자는 정부 지원 사업뿐만 아니라 정책자금·대출금 신청과 외부 기관 투자 유치에서도 제약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청년창업세액감면과 같은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봤다"고 했다.
선배 창업가들을 지켜보며 느끼는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간접적인 트라우마로 인해 창업 기업 수도 줄어들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2025년 연간 창업기업동향'에 따르면 창업 기업 수는 최근 5년 새 계속 감소하고 있다. 2021년 141만7973개에 달했던 창업 기업은 지난해 113만5561개를 기록하며 30만개 가까이 줄었다. 그나마 창업을 해도 안전한 매뉴얼이 있고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무인 점포·카페·요식업 등 '생계형 창업'으로 몰리는 분위기다.
'위험한 창업을 하느냐, 상대적으로 안전한 창업을 하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한국의 위험 회피와 안전 지향은 유달리 높은 수준이다. '글로벌기업가정신연구협회'에서 발표한 '2025년 글로벌 기업가정신 모니터' 조사에 따르면 초기 창업가들 중 창업 동기로 '세상에 변화를 만들기 위해'를 꼽은 비중은 4.4%로 조사 대상 48개국 중 가장 낮았다. '소득을 높이고 큰 부를 창출하기 위해'라는 답변은 88.9%로 두 번째로 높았다. 인도의 경우 '세상에 변화를 만들기 위해' 창업한다고 답변한 비중이 82.3%, 미국은 66.5%에 달했다.
[서정원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 보내달라”…트럼프 요청에 영국의 대답 - 매일경제
- 이란전 최대 승자 된 한국 해운사…빈 유조선 들고가 ‘하루 50만달러’ 싹쓸이 - 매일경제
- 어쩐지 공식 석상에 안 나오더라…이란 최고지도자, 어디 있나 했더니 - 매일경제
- “브랜드보다 성능”…쏟아지는 러닝화에 ‘이 기술’이 승부 가른다는데 - 매일경제
- [속보] 靑, 美 호르무즈 군함파견 요청에 “한미 간 긴밀히 연락 중” - 매일경제
- “난 거실에 있는데 남편과 엄마는 방에서”…장모 사위 불륜 폭로한 유명 배우 - 매일경제
- “노후자금, 삼전닉스에 물렸는데 기다려요?”…골드만삭스 대답은 - 매일경제
- ‘오픈런 열풍’ 버터떡, 이제 편의점 앱서도 구할 수 있다 - 매일경제
- 하루 8억 불러도 OK…‘유조선 싹쓸이’ 장금상선 자회사 주가 불기둥 - 매일경제
- 배구 김연경, 국제올림픽위원회 성평등 포용 아시아상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