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세평]전남·광주 통합, 정도전에게 묻다-행정통합을 넘어 문명 전환의 기회로

전남·광주 행정통합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통합을 행정구역 조정이나 지역 경쟁력 강화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면 이번 통합은 단순한 행정 개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새로운 지역 질서를 실험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여러 위기가 동시에 겹쳐 나타나는 복합적 구조 위기의 시대다. 세계적으로는 기후 위기와 불평등의 심화, 정치적 분열, 기술 변화가 사회의 기존 질서를 흔들고 있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그 성과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정치 제도는 시민의 판단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기술은 기존 제도의 속도를 훨씬 앞질러 사회 구조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징후들은 단순한 정책 실패라기보다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는 신호에 가깝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상황은 낯선 것이 아니다. 고려 말 역시 정치와 경제의 질서가 동시에 흔들리던 시기였다. 권문세족 중심의 지배 구조로 인해 국가 운영의 효율성이 약화 되었고, 토지 제도는 사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단순히 왕조 교체를 주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낡은 제도를 정리하고 새로운 국가 운영 원리를 설계한 사상가이자 제도 설계자였다.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을 통해 그는 국가 권력의 구조, 행정 체계, 토지 제도, 군사 체제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국가 모델을 제시했다. 왕조의 교체는 결과였을 뿐이며, 그의 진정한 관심은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 점에서 정도전과 신진 사대부들의 개혁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들은 낡은 체제를 부분적으로 보수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국가 운영의 틀을 설계하려 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구조의 재설계였다. 전남·광주 통합 역시 마찬가지다. 통합을 통해 행정 규모가 커지고 재정이나 정책 역량이 확대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통합 이후 어떤 사회 모델을 만들 것인가이다. 만약 통합이 기존 행정 체계를 단순히 확장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역사적 기회의 상당 부분을 놓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지금은 새로운 광역지방정부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시점이다. 전남은 풍부한 자연과 에너지 자원을 가지고 있고, 광주는 기술과 산업 기반을 갖춘 도시다. 두 지역이 결합한다면 기후·에너지 전환, 지역 산업 혁신, 시민 참여형 거버넌스와 같은 새로운 정책 모델을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지역 발전 전략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지금 세계가 직면한 복합위기의 시대에는 성장 중심의 경제 질서만으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앞으로의 사회는 회복력, 지속가능성, 공공적 판단을 중심으로 다시 설계될 필요가 있다. 행정통합이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실험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전남·광주는 단순한 행정구역의 확대를 넘어 미래 사회의 모델을 제시하는 지역이 될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려는 용기가 있었을 뿐이다. 정도전이 그랬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기존 제도의 틀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설계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전남·광주 통합이 단순한 행정 확대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모색하는 실험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우리는 통합 이후 어떤 경제 구조를 만들 것인지, 어떤 정책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공동체 모델을 지향할 것인지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전남·광주 통합이 이러한 질문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행정 개편을 넘어 신문명으로의 전환을 향한 역사적 출발점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질문을 정도전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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