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 닮은 상처, 절망을 품은 두 여자의 위험한 재회…연극 ‘말벌’

학창 시절 이후 20년 만에 만난 두 여자, 헤더와 카알라 사이에는 반가움보다 묘한 공기가 감돈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는 소녀 시절이란 대개, 지워지지 않는 ‘흑역사’ 하나쯤은 품고 있기 마련이니까.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묻던 대화는 예상치 못한 헤더의 제안으로 방향을 바꾼다. “남편을 죽여줘.” 두 여고 동창생의 만남은 미스터리한 긴장감에 휩싸이고, 묻혀 있던 과거의 사건과 기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 연극 ‘말벌(THE WASP)’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 온 두 여성의 상처와 내면을 파헤치는 2인극이다. 영국 연극계가 주목하는 극작가 모건 로이드 말콤의 대표작으로, 폭력의 기억과 계급 격차,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2015년 영국 런던 햄스테드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한국에서는 처음 관객을 만난다.
극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의 대비에서 출발한다. 단정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장한 헤더는 겉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 세련된 외모와 직업을 가진 그는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결핍 속에서 내면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다. 반면 카알라는 거칠게 삶을 버텨온 인물이다. 가죽점퍼에 거친 말투, 임신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 문다.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강한 생존 본능과 직설적인 태도로 세상을 견뎌왔다.

각각 ‘모범생’과 ‘문제아’로 학창 시절을 보낸 두 사람의 구도는 언뜻 분명해 보인다. 고교 시절 친구였던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 멀어졌고, 헤더는 카알라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 폭력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헤더가 피해자라면, “그땐 어렸고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사과하는 카알라는 가해자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구도가 끊임없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숨겨졌던 과거와 인물들의 심리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며 반전을 거듭한다. 관객은 카알라 역시 어린 시절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헤더가 계급적 우위를 이용해 카알라를 모종의 함정에 빠뜨리는 상황을 지켜보며 혼란에 빠진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헤더에게 감정이입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카알라의 분노와 결핍을 이해하게 되며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단 두 명의 배우가 이끄는 무대는 90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폭력과 상처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치밀한 심리싸움과 인물들의 에너지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극에 몰입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제한된 2인극인 만큼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를 온전히 집중해 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헤더 역에는 김려원, 한지은, 이경미가, 카알라 역에는 권유리와 정우연이 이름을 올렸다. 연출은 베테랑 배우이기도 한 이항나가 맡았다.
작품은 폭력의 기원을 추적하기보다 그 기억이 인간의 내면에 어떻게 남아 삶을 뒤틀어 놓는지에 주목한다. 공연의 제목 ‘말벌’ 역시 이러한 상징을 담고 있다. 말벌이 독침으로 먹이를 마비시키듯, 오래된 상처 역시 인간의 삶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독침에서 자라난 절망을 품고 있는 두 사람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날카로운 질문을 남긴 채 극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공연은 다음 달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이어진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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