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의 대풍헌] 관객이 된 인류, 다시 인간의 봄으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2026. 3. 16. 16:1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정치의 난장판 속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인간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계절은 그 혼란에 흔들리지 않는다. 땅은 때가 되면 묵묵히 싹을 틔우고, 꽃은 약속이라도 한 듯 피어난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 새벽 뜰에서 매화를 문향(聞香)하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타인의 고통조차 하나의 영상처럼 소비되는 시대다. 치솟는 불길, 폐허가 된 건물, 폭격에 아이를 잃은 부모의 절규마저 점점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뉴스 화면에는 영화 같은 효과음이 깔리고, 장면들은 정교하게 편집되어 물처럼 흘러간다. 실제의 비극인데도 어딘가 잘 만들어진 픽션처럼 보인다. 매일 전쟁 보도를 접하다 보면 감각은 서서히 무뎌진다. 참혹한 장면도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마음의 빗장은 잠긴다. 이것이 이른바 '이미지 중독'이다. 처음에는 숨이 막히던 충격도 여러 번 되풀이되면 스쳐 지나가는 화면이 된다.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장면'이 되고, 우리는 그 장면을 무심히 바라보는 관객으로 변해 간다. 현실의 비극이 드라마처럼 느껴질 때, 인간의 감수성은 이미 깊이 마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떠올린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전쟁의 영웅담을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 속에서 서서히 붕괴하는 인간의 삶과 사랑을 차갑게 비춘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구급 장교로 복무하던 프레더릭 헨리는 부상병을 실어 나르며 전쟁의 무의미함을 체득한다. 포탄과 선혈, 명령과 후퇴가 반복되는 전선에서 그는 영웅이 아니라 그저 생존하려 애쓰는 한 인간일 뿐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수지만, 그 뒤 많은 이는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죽인다. 아주 선한 사람도, 아주 다정한 사람도, 아주 용감한 사람도 차별 없이 죽인다." 주인공 헨리는 "나는 전쟁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죽음과 파괴를 미화하는 모든 수사를 거부하는 이 선언은 전쟁의 본질을 관통한다.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되지만, 전쟁의 실체는 인간이 일군 가장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파괴일 뿐이다.

들길을 걷는다. 겨울을 밀어내고 솟아오르는 풀잎 사이로 향긋한 흙냄새가 번진다. 대지는 침묵하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정적 속에서 생명의 함성이 들린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살아 있다는 것이 꿈같기도 하고 기적 같기도 하며, 때로는 무거운 숙명처럼, 저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것들은 살아야 한다. 세상에 의해 부서졌을지라도 그 부서진 자리에서 다시 각자의 몫을 감당하며 오늘을 건너야 한다. 봄의 초목들이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곁을 내주며 자라듯이, 우리 역시 조금은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원망과 미움을 내려놓고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려 애쓸 수는 없을까.

바람이 분다. 꽃이 피고 꽃잎이 흩날린다. 전쟁도, 정치도, 인간의 분노와 슬픔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을 지나간다. 봄은 매년 다시 돌아온다. 봄은, 아무리 가혹한 겨울이 세상을 덮어도 땅속의 씨앗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고, 상처 입은 시간의 밑바닥에서도 생명은 다시 숨을 고른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거두지 않는 한 인간의 봄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다시 이해할 수 있으며,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꽃이 피는 순간처럼 인간의 마음 또한 다시 열릴 수 있다. 어쩌면 봄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매년 돌아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