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교도소에서 대한민국을 물들이는 마약왕 박왕열의 실체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2026. 3. 1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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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 살해 뒤 현지 감옥에서 ‘황제 생활’…막대한 자금력으로 위세
텔레그램 통해 마약 유통망 지휘…국내 송환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

(시사저널=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대한민국은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니다. 텔레그램이라는 은밀한 통로를 이용해 일상의 틈새로 독버섯처럼 번진 마약은 10대 청소년부터 유명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그 마수를 뻗치고 있다. 수사기관이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 유통책들을 잡아들여도, 시장에 공급되는 마약의 양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거대한 '독의 생태계' 뒤에는 한 남자가 있다. 2016년 필리핀에서 한인 3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흉악범이자, 현재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로 한국 마약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인물. 닉네임 '전세계'로 불리는 박왕열(48)이다. 그는 어떻게 평범한 수산물 유통업자에서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마약왕으로 진화했는가. 그가 필리핀 사탕수수밭에 묻어버린 진실과, 교도소 창살 너머로 지휘하는 거대 범죄의 실상을 집중 조명했다. 

ⓒChatGPT 생성이미지

평범한 수산물 유통업자에서 인생 바뀌어

박왕열은 원래 국내에서 수산물 수입유통회사를 운영하던 기업인이었다. 필리핀에서 공수해온 생참치를 국내 백화점에 납품하고, 대전 등지에서 '참치 해체쇼'를 열며 언론 인터뷰까지 하던 인물이다. 단정한 뿔테 안경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그는 영락없는 우리 주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고 사업 실패를 겪으며 그의 내면은 뒤틀리기 시작한다. 2010년대 초반, 그는 새로운 기회를 찾겠다며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건실한 사업 대신 사설 카지노와 불법 도박 사업을 운영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2016년 10월, 그의 운명을 바꿀 40대와 50대의 남녀 세 명이 나타난다. 유사수신(투자 사기)을 하던 친누나의 소개로 만난 박아무개씨, 심아무개씨, 그리고 맹아무개씨다. 이들은 한국에서 130명에게 150억원대 유사수신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 중이었다.

박왕열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겠다고 접근했다. 거액의 도피 자금을 쥐고 있던 이들은 박왕열을 철석같이 믿었다. 박왕열은 그들에게 "필리핀 카지노 사업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주겠다"며 드러난 것만 7억원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투자 수익금 배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그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잔혹성이 고개를 들었다.

2016년 10월11일 새벽, 필리핀 팜팡가주의 한 고요한 사탕수수밭. 동이 트기 전의 짙은 어둠 속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박왕열은 공범 김춘수와 함께 피해자들을 납치해 결박한 뒤, 머리에 총을 쏴 살해했다. 시신은 3m 높이의 빽빽한 사탕수수 숲 사이로 굴려졌다. 이후 그들의 주머니와 금고에 들어있던 100억원대 도주 자금이 사라졌고, 거액의 행방은 박왕열만이 아는 비밀로 남았다. 

박왕열은 사건 발생 37일 만에 마닐라의 대형 콘도에서 검거되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법의 심판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필리핀의 부패한 사법 시스템은 그에게 탈출구였다. 2017년 3월, 외국인 이민자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던 그는 삼엄한 감시를 뚫고 천장을 뜯고 첫 번째 탈옥에 성공한다. 두 달 만에 붙잡혔지만, 진짜 황당한 일은 2019년 10월에 일어났다. 

재판을 받고 돌아가던 길, 박왕열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현지인 여자친구와 동행한 호송관들을 식당에 앉혀두고 화장실 창문을 통해 유유히 사라졌다. 이 1년간의 도주 기간은 그가 단순 살인범에서 '마약왕'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시간이었다. 

그는 필리핀 감옥 수감 당시 만난 '동남아 3대 마약왕' 중 한 명인 '사라 김(김형렬)'으로부터 마약 유통의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전수받았다. 텔레그램 닉네임 '전세계'. 그는 비대면 거래의 익명성 뒤에 숨어 국내 마약 유통망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가 구축한 '바티칸 킹덤'이라는 하부 조직은 국내 20·30대 초범들을 포섭해 마약을 광고하고, '던지기'(특정 장소에 마약을 숨겨두고 찾아가게 하는 방식) 수법으로 전국에 마약을 뿌렸다.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가 투약한 마약 역시 이 '전세계'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한 달 유통 규모는 필로폰만 60kg, 시가 3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됐다. 2020년 10월 다시 체포될 때까지, 그는 필리핀 어딘가에서 스마트폰 하나로 대한민국의 밤을 오염시켰다.

박왕열이 국내 마약 유통책과 텔레그램으로 마약 판매를 논의하는 대화 내용 ⓒ경남경찰청 제공

교도소에서 스마트폰 텔레그램으로 지시

박왕열은 한국인 3명을 살해한 혐의로 필리핀 대법원에서 징역 60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이라면 철저한 고립과 반성의 시간이겠지만, 필리핀의 뉴빌리비드 교도소(NBP)는 달랐다. 이곳은 교도소라기보다 거대한 '범죄자 마을'에 가깝다. 돈만 있으면 개인실을 쓰고, 에어컨을 돌리며, 테니스와 스파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박왕열은 이곳에서 명실상부한 'VIP'로 군림하고 있다. 사탕수수밭에서 가로챈 돈과 마약 사업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력 덕분이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도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여전히 텔레그램을 통해 국내 마약 유통책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실제로 2023년에도 그를 면회하고 온 인물이 국내에 마약을 공급하다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뻔뻔함은 극에 달해 있다. 국내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 나타나 "내가 마약을 팔았다는 증거가 있느냐" "내가 입을 열면 한국 검사들 중 옷 벗을 놈들 많다"고 수사기관을 조롱했다. 심지어 자신을 추적하는 유튜버나 제보자들에게 청부살인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다. "구매자가 없으면 어떻게 팔겠나, 삼성 휴대폰에 중독되면 이건희가 나쁜 놈이냐"는 그의 궤변은 그가 얼마나 죄책감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필리핀을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박왕열의 '임시 인도'를 요청했다. 필리핀에서 60년 형기를 다 채우고 나면 박왕열은 이미 100세가 넘는 노인이거나 시신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법정에 그를 세우고, 마약 조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현지 형 집행 중에도 한국으로 신병을 데려오는 '임시 인도' 조치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장벽은 여전히 높다. 지난 6년 넘게 우리 정부와 수사기관은 "현지 사법 절차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 뒤에 숨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필리핀 공무원들의 부패로 인해 범죄인 인도 절차가 보류되거나 지연되는 동안, 박왕열은 감옥 안에서 세력을 더 키웠다. 마약 유통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다시 현지 교도관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고, 그 대가로 자유를 보장받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한 명의 살인범을 처벌하는 문제가 아니다. 박왕열은 대한민국 마약 유통의 거대한 '허브'다. 그를 송환해 입을 열게 해야만 국내에 숨어있는 '상선'들과 부패한 권력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박왕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뼈아픈 교훈을 남긴다. 해외 체류 범죄자에 대한 사법 공조가 무기력할 때 국경 너머의 범죄가 어떻게 국내 안방까지 침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또한 '마약 범죄'는 이제 특정 계층의 일탈이 아닌, 거대 자본과 흉악 범죄가 결탁한 구조적 재난이라는 점이다.

박왕열을 국내 법정에 세우는 것은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을 한국 법정에서 단죄하고, 마약으로 무너져가는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필리핀 정부의 협조를 끌어낼 강력한 외교적 압박과 더불어, 궐석기소 등 할 수 있는 모든 사법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박왕열은 지금도 감옥 안에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그의 손놀림에 베일에 가려진 마약 조직이 움직이고, 수많은 마약이 국내에 공급되며, 누군가의 인생을 파괴하고 있다. 그를 필리핀 감옥의 'VIP'로 방치하는 한, 창살 뒤에서 계속 진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마약 전쟁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 언제까지 그를 창살 뒤 '왕'으로 남겨둘 것인지는 우리 사회에 남겨진 커다란 과제다. 

■필리핀 교도소의 부패 구조 이용해 감옥을 '마약 사업 본사'로 만들어

박왕열의 심리 기저에는 인간을 인격체가 아닌 '수익을 위한 도구'나 '방해되는 장애물'로만 인식하는 포식자적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에서 그는 이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자신을 믿고 거액의 돈을 맡긴 도피자들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처단한 것은 그에게 공감 능력이 완전히 결여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는 두 번의 탈옥을 통해 단순한 폭력범 그 이상의 지능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의 탈옥은 영화처럼 담장을 넘는 물리적 탈출이라기보다, 현지 시스템의 부패와 허점을 정확히 꿰뚫고 이용한 '심리 전술'에 가깝다. 돈으로 교도관을 매수하고, 여자친구를 이용해 호송 중 식사 자리를 만드는 과정은 치밀한 계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박왕열은 공권력을 비웃는 오만함을 학습했다. 시스템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래'하는 대상이라는 인식은 그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탈옥 성공은 그에게 "나는 법 위에 있다"는 강한 자기 확신을 심어주었으며, 이는 이후 마약왕으로 군림하는 심리적 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 탈옥 이후 종적을 감춘 박왕열이 선택한 가면은 텔레그램 아이디 '전세계'였다. 그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 채 가상세계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축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텔레그램 공간에서 그는 신비주의를 고수하며 하부 조직원들에게 공포와 동경을 동시에 심어줬다. 그는 자신의 조직을 '전세계 패밀리'라 부르며 기업형 구조로 운영했다. 이는 그가 단순히 마약을 파는 것을 넘어, 자신의 닉네임처럼 '전 세계'를 호령하는 지배자가 되고 싶어 하는 뒤틀린 권력욕을 반영한다. 

박왕열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장소와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사업가 마인드'다. 60년형이라는 절망적인 선고 앞에서도 그는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필리핀 교도소의 부패한 구조를 파악하자마자, 그는 감옥을 안전한 '본사'로 변모시켰다. 외부의 적이나 수사기관의 추적에서 자유로운 감옥 안에서 그는 오히려 안정적으로 마약 유통을 지휘했다.

박왕열은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부패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강자'이자 시스템의 '희생자'로 묘사한다. 이는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형적인 방어 기제인 동시에,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영웅심리의 발로다.

박왕열은 단순히 운이 좋아 마약왕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공권력의 부패, 그리고 가상세계의 익명성을 가장 완벽하게 결합한 인물이다. 그의 심리는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양분 삼아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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