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특별법"…삼성-SK 반도체 주도 '분투' 정부는 '뒷짐'
“정부가 기업 역량 못 따라가”
[미디어펜=조우현 기자]대한민국 반도체 기업들이 규제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세계 1위’의 위상을 지켜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뒷받침해야 할 정부 정책은 수년째 ‘직접 보조금 불가’라는 원칙만 되풀이하며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성과는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아닌, 오로지 기업 스스로의 사투 끝에 얻어낸 결실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쟁국들이 파격적인 노동 유연성을 보장받을 때, 우리 기업들은 획일적인 주 52시간제와 보조금 전무라는 상황에서 기술력 하나로 전 세계 빅테크들의 러브콜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방해만 하지 않아도 격차를 더 벌렸을 것”이라는 탄식이 쏟아지는 이유다.
◆ 다년간 보조금 논의 ‘답보’… 특별법에도 ‘실탄’은 빠져
반도체 직접 보조금 지급 필요성은 다년간 업계와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미국이 2022년 ‘칩스법’을 통해 총 527억 달러(약 70조 원) 규모의 현금 실탄을 쏘아 올리고, 일본이 자국 기업 라피더스 등에 조 단위 보조금을 투입하는 사이 우리 정부의 대응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지난 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반도체 특별법’ 역시 이러한 답보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번 법 제정으로 개별 법률에 의존하던 지원이 국가 차원의 종합적 체계로 전환되고, 인허가 패스트트랙과 특별회계 신설 등 제도적 기반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업계가 요청한 직접 보조금 조항은 이번에도 ‘재정 여건’과 ‘특혜 논란’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명문화되지 못했다. 대신 도입된 세액 공제 연장안은 이익이 나야만 혜택을 받는 구조여서, 대규모 선제 투자가 필요한 현시점에는 ‘사후 약방문’ 식의 약속어음에 불과하다.
◆ “인프라도 기업 몫”… 대만 대비 가혹한 비용 부담
글로벌 경쟁사들과의 지원 격차는 현금 보조금뿐만이 아니다. 대만 정부는 TSMC 등 자국 기업을 위해 전력, 용수 등 기초 인프라를 국가가 직접 구축해 제공한다. 반면 한국은 용인 메가 클러스터 등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송전선로 건설비와 같은 막대한 비용을 기업에 분담시키고 있다.
특히 용인 클러스터 가동에 필수적인 송전망 구축에만 약 3조 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정부는 지중화 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방안을 국회와 협의 중이나 최종 부담 비율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정부가 생색을 내는 사이, 실제 수조 원대 사업비의 상당 부분이 기업의 몫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 R&D 족쇄와 인재 엑소더스 가속화
가장 치명적인 규제는 연구·개발(R&D) 현장을 가로막는 주 52시간제다. 특별법 논의 과정에서도 기대를 모았던 근로시간 예외 조항은 결국 노동계 반발로 제외됐다. HBM4 수율 확보의 결정적 순간에도 우리 연구원들은 규제에 묶여 연구실 불을 꺼야 한다.
이러한 ‘혁신 셧다운’은 최고급 인재들이 몰입 환경과 성과 보상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인재 엑소더스’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기업이 악착같이 기술을 개발해도, 정부가 제도로 인재를 밀어내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지원을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로 보는 시각이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최대 걸림돌이라고 경고한다. 미국과 일본이 자국 기업뿐 아니라 해외 기업에까지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특혜가 아니라 ‘미래 국가 먹거리 선점’이기 때문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업은 글로벌 체급인데, 정부의 규제와 지원책은 여전히 국내 리그에 머물러 있는 ‘미스매치’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한민국 반도체가 ‘메모리 초격차’를 넘어 AI 시대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면, 정부가 ‘뒷짐’을 지는 단계를 넘어 기업과 함께 뛰는 ‘페이스메이커’가 돼야 한다“며 ”사후적 세액공제를 넘어 선제적 보조금 지급 및 주 52시간제 R&D 예외 등 과감하고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