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쓰고, 반복처럼 살아가는 작가 문지혁

신승민 2026. 3. 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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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승민의 그 작가의 TMI
이별과 정착의 교차로에서…'쓰는 자의 필연' 문지혁의 여행
청춘 유럽 여행기 신작소설 <나이트 트레인>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길 위의 '자기 발견'
이민·교육자 경험 담은 '한국어' 시리즈
자전과 픽션 넘나든 '인생 작법'의 비밀
대신 나는 그때 하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 난 반지를 좋아하는 게 아냐. 널 좋아하는 거지. 그러자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튕겨 나오듯 솟아올랐고, 나는 수평선을 향해 있는 힘껏 반지를 던졌다. 작은 은반지는 공기 중에 잠시 먼지처럼 날아올랐다가 곧 흔적도 없이 에메랄드색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문지혁 장편소설 <나이트 트레인>, P.154

프랑스 남부 지중해 바닷가 ‘니스’. 야간열차를 타고 유럽을 종횡하던 대학생은 마침내 그곳에서 ‘애증의 은반지’를 던지고 별리(別離)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이국(異國)에서 떠나보낸 반지는, 기억 저편으로 묻어버린 청춘의 상자 속에 고이 모셔져 사반세기를 지나 그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홀연히 떠난 이역만리 타국 땅. 타들어 가는 마음과 함께 이별 선물을 순장(殉葬)하던 그의 낭만적 애도의식은 ‘영원회귀’의 운명 앞에 속수무책이 된다. 내게로 되돌아가는 여행, 그 무한궤도 속으로 야간열차는 간다.
20대 시절 유럽 여행기의 자전적 경험을 담고 있는 신작 장편 <나이트 트레인>은 문지혁표 서사장르 ‘오토픽션’을 잘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사진. 작가 및 출판사 제공

지나가 버린 일상과 추억을 뜨거운 사건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현대적인 작가. 소설가 문지혁이 신작 장편소설 <나이트 트레인>으로 돌아왔다. 지난 1월 짧은 소설집 <당신이 준 것> 출간에 이어, 불과 한 달 만에 또 다른 새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작가·교육자·이민자의 생활 경험과 정체성 고민을 녹여낸 그의 대표작 이른바 ‘한국어 시리즈’도 초급․중급에 이어 실전 타이틀을 달고 곧 나올 예정이다. 현재까지 올 상반기에만 3권의 신작을 펴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는 그의 집필 저력은 무엇일까. 자전적 경험과 서사적 허구를 혼합해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오토픽션(autofiction)’ 장르의 개척자. 문지혁의 작법세계로 들어가 보자.

인생은 회귀하는 ‘과정’, 소설은 고쳐 쓰기의 ‘반복’

20대 초반 실연당한 대학생의 유럽 야간열차 여행기를 담은 신작 <나이트 트레인>은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 문제를 다루면서도 세계관이 ‘사랑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여행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설계하는 ‘자아 탐색’의 여정이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라고 반문하며, “아마도 여행을 마칠 때는 이전과 같지 않을 마음,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믿으며 바라는 마음”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쓰다가 말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계속 쓰는 것과 계속 쓰지 않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다. 둘 사이를 오가는 것. 떠난 자리로 돌아오는 것. 여행에 관한 기록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알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여행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여행만이 가치 있다. 여행만이 존재한다. 다른 것은 없다.
-문지혁 장편소설 <나이트 트레인>, P.13

다소 돌발적으로 떠난 여행이지만 이를 계기로 떠나간 연인을 마음에서 지우고, 새 인연을 만나 가족으로 정착하는 과정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다른 세계로의 도피가 아닌 자기 세계를 축조하는 회귀 본능이자, 보다 성장하고 전진하게 만드는 동력의 발현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행의 반복을 통해, 일순간의 해방감과 복귀할 때의 아쉬움을 교차적으로 느끼며 ‘현실을 새롭게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창작활동 외에도 유튜브 채널 운영과 글쓰기 강의를 이어온 문지혁은 여러 작법 강연을 통해, ‘여행을 반복하는 인생’처럼 소설도 ‘고쳐 쓰기’의 부단한 과정이라고 논한다.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전력투구의 자세보다는, 그 쳇바퀴 같은 노정을 생활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를 향유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지혁에게 문학이란 거창한 예술보다는 일상의 노동에 가까운 것. 그의 작품들이 컨셉은 소박할지 모르나 서사 구조적으로는 깊은 철학을 보여주는 까닭은, 자전과 픽션을 가감하며 무수히 퇴고해 온 노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문지혁 작가는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 등 자전소설 시리즈와 작법서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등을 통해 ‘쓰는 삶’의 가치와 일상에서의 힘을 강조해 왔다. / 사진. 출판사 제공

습작생의 추억과 여행자의 삶…‘사적 경험’에서 ‘공감 문학’으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능란하게 지워버리고, 개인의 경험을 문학적 공감으로 승화시켜온 소설가 문지혁. 그의 소설들에는 자전적 요소답게 습작생의 기억이 공통적으로 새겨져 있다. 주인공은 일본과 미국, 유럽 대륙에 이르기까지 분주한 ‘여행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 손에는 두툼한 소설 초고를 들고 있다. 투박한 원고의 첫 독자가 친구였다는 설렘, 강단과 문단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우리네 문청(文靑)의 신열(身熱)을 연상케 한다.

소설가 문지혁은 ‘쓰기의 반복과 문학으로의 여행’을 통해, 실연과 낙방과 부유하는 삶의 불안을 씻어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낼 수 있었다. / 사진. 작가 제공

실제 그는 2010년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단편 ‘체이서’가 선정돼 본격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신춘문예와 신인문학상 낙방을 거듭하던 습작생이었다. 초등학생 때 책을 직접 만들어 친구들에게 팔기도 하고, 중학생 때는 인터넷에 SF소설까지 발표하는 등 어릴 적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왔던 문지혁. 그는 등단의 고배는 물론 데뷔 후에도 평단의 무관심에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시시포스의 천형(天刑)과도 같은 ‘쓰기의 반복과 문학으로의 여행’을 통해, 그는 실연과 낙방과 부유하는 삶의 불안을 씻어내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낼 수 있었다.

문지혁의 시그니처 작품 ‘한국어 시리즈’는 작가 지망생이자 한국어 강사인 저자 본인의 외국 체류기, 일상 생활기를 다루면서 ‘반복해서 쓰는 삶’의 힘을 강조했다. 어휘부터 작문까지, 외국인들을 가르치는 작중 문지혁의 ‘한국어 교육’은 한편으로 본인이 헤쳐 나가야 할 ‘작가적 관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낙방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작가로서 올라서기 위해 외국인들 못지않게 ‘한국어’를 쓰고 고치며 계속해서 익혀야 하는 운명인 셈이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고,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며, 되풀이만이 삶”(<중급 한국어>)이라는 무한 습작과 인생 수업의 연결고리. 일탈은 영원하지 않고 현실 밖의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 그는 누구든, 무엇이든 ‘쓰기’를 시작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쓰는 모든 것은 결국 자서전의 성격’이며, 그렇기에 자전적 기반의 ‘오토픽션이 문학의 미래’라고 말하는 문지혁. 누군가의 흘러가 버린 내밀한 기억의 조각들조차 서사로 재탄생한다면, 독자의 고급화된 기호를 공략하는 ‘파인 다이닝 문학’이 될 수 있다며 확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반복함으로써 필연을 부르게 되듯, 경험을 쓴다는 것은 공감과 맞닿아 있기에…. 문지혁의 소설은 그래서 그 자신이자 우리 자신을 만나게 하는 다리라 할 것이다.

▶▶[아르떼 살롱] 문지혁 작가 이야기 들으러 가기

신승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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