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은 빛이 되고, 빛은 공간이 되고… 경계 허문 ‘공존의 조각’[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2026. 3. 1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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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5) 한계를 뛰어넘는 연출… 조각가 박충흠
구리·철 등 용접으로 불꽃 가해
미세한 구멍 속에 빛 투과시켜
공간에 ‘새로운 드라마’ 만들어
산 등 대자연 형상 재현한 작품
공원 등에 설치해 관람객과 소통
현대조각의 독자적인 언어 구축
작은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게 연출한 박충흠 작가의 대표작 ‘무제’. 구리를 주재료로 사용한 2001년 작으로, 빛과 그림자의 형태가 자연과 공존할 수 있음을 표현했다. 작가 제공
박충흠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한국 현대조각사에서 박충흠은 ‘형태와 빛의 상호작용’ 그리고 ‘공간과 관람자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한 조각가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평가의 핵심을 필자는 ‘공간에 관한 인식의 변환’이라 규정한다. 조각 자체가 ‘주체(subject)’였던 시절, 그것이 놓일 공간은 ‘종속적’이거나 ‘대상적’이었다. 그러나 박충흠의 조각이 놓일 공간은 공간 그 스스로 주체적이다. 조각이 놓일 장소로서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공간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오히려 조각을 받아들이는 반전의 양상까지 가능한 것이 박충흠 조각의 핵심이다. 그의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한국 추상조각의 한 축을 이루며, 이념이나 서사보다 물질, 빛, 공간 사이의 관계성을 탐구해 온 다음과 같은 점이 특징적이다.

2001년 작 ‘무제’와 1998년 작 ‘무제’를 위아래 배치한 모습.

1. 금속 구조의 유기적 결합… 불꽃 유기적인 금속 구조와 빛―공간의 재해석

조형적으로 박충흠의 최근 작품은 평면적 입체감의 조각이다. 입체는 아니되 입체감은 느낄 수 있다. 부피를 가진 덩어리이긴 하나 속이 비었거나 한 곳이 트여 있어 양감을 느낄 수 없다. 작업의 형태적 완결성은 무수히 작은 동판들을 용접으로 하나하나 붙여 나가는 결정(結晶)의 집합체인 셈이다. 용접의 순간적인 불꽃들이 만들어 내는 미세한 차이의 구멍과 틈들이 향후 빛과 그림자의 드라마를 연출해 내는 결정적인 장치다. 이렇게 생성된 틈으로 빛이 투과하면서 작품 자체가 빛의 조각이 되기도 하고,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을 연결하는 열림의 구조로 읽히기도 한다. ‘빛의 도약’이라는 측면에서 낮에는 태양 빛으로, 밤에는 내부 조명으로 발산되는 빛이 작품의 표면과 주변 공간을 다채롭게 채워 준다. 이는 금속의 견고함을 유지하면서도 빛의 변화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시각적 효과를 생성한다. 따라서 금속 조각을 단순한 물질로 소비하지 않고 시간과 빛을 매개로 한 입체적 공간 경험으로 확장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스테인리스강으로 제작한 2011년 작 ‘산-하늘문’.

2. 공간·빛·관람자 경험의 통합

현대조각이 보다 적극적으로 공간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공간이 더 이상 조각의 들러리 역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과 동등한 입장으로, 조각만큼의 중요성으로, 아니 입체와 오브제로서의 조각보다 더욱 중요한 조형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충흠 작품은 재료(금속)와 공간을 분리된 대상으로 보지 않고, 빛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연결하는 독창적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때문에 작품에 임한 작가의 태도가 조형적 오브제로서의 작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연출될 공간 전체의 ‘아우라’를 포함한, 심지어 그 아우라에 대한 관람자들의 반응까지도 고려했다는 측면에서 박충흠은 기존의 조각 개념과는 다른 공간의 아이디어를 실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 현대조각의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관계와 체험을 강조한 새로운 방향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따른 ‘설치적’ 태도 역시 공간의 연출을 위한 단순한 아이디어이지만 그것이 파생시킬 여러 교감까지 고려한다면 관람자는 그의 작품을 단순한 오브제라기보다 총체적인 태도로 감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오브제로서의 작품을 포함한 공간 전체의 분위기 자체가 작품이므로 관람자 역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1983년 작 ‘무제’.

3. 형태와 자연의 공존

전통적인 자연주의와 현대 추상 형식 사이에서 자연의 형상(산, 봉우리, 하늘)을 조각으로 재현하면서도 그것을 단순 모방이 아닌 구조적 재해석으로 제시했다는 점도 중요한 미술사적 평가 요소다. 미술관, 화랑 등의 실내 공간에서 벗어나 조각이 대지의 자연과 함께 대중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환경조각으로 확장된 것이다. 좌대와 덩어리로서의 볼륨(volume)과 매스(mass)가 기본이었던 전통적인 조각 개념을 해체하여 공간 자체를 입체로 수용하는 연출자로서의 태도가 조각가에게 새롭게 대두된 것이다.

‘무제’는 형태와 자연의 공존을 제시한 대표적인 사례의 조각이다. 동(copper)을 주재료로 야외에 설치된 작품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을 정도의 스케일로 대지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설치 조각이다. 또 다른 ‘무제’는 매끈한 장식성의 추상적인 실내조각이 이제 좌대가 필요 없는 자연으로 나왔다. 여러 봉우리와 곡선이 만들어 내는 형태는 우리의 산과 바다의 섬들을 연상시키며, 조각으로 보기를 기대하는 관람자에게 단순히 감상만 하는 존재를 넘어 공간과 상호 작용하는 친근감을 갖게 한다. 그의 조각은 일방통행의 ‘완결된 조형물’이 아니라 현장성과 경험성을 강조하는 참여형 작업으로, 관람자와 공간을 하나로 묶는 쌍방 통행의 매체로 조각을 변화·발전시켰다.

독립기념관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3·1정신상’.

‘산-하늘문’은 난지 하늘공원에 설치한 작가의 대표 야외 작품으로 형태를 통해 자연과 장(場)을 이어 주는 소통의 설치조형물이다. 스테인리스강으로 제작한 대형 설치 작으로, 약 9m 지름과 4m 높이의 구조가 삼각형 조각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는 산맥을 연상시키면서도 중앙이 ‘열려 있어’ 하늘을 향해 보는 이의 시선을 이끈다. 단지 조형물이 아니라 공원 공간의 부분으로 작동하며, 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설치예술로서도 기능한다. 이처럼 박충흠의 야외 조형물은 자연으로서의 산, 하늘, 대지와 조각의 관계를 물질적으로 표현하며 전통적 조각 개념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예술적 성취를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들로, 박충흠이 한국 현대조각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작가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현재 작가의 작품을 관람하기 좋은 장소로는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작가의 스튜디오 겸 미술관이 있다. 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 ‘무제’,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의 ‘산-하늘문’, 충남 목천 독립기념관 입구로 옮겨진 ‘3·1정신상’, 제주현대미술관의 ‘빛의 도약’, 신세계백화점 본점 옆의 환경조각 등이 누구나 쉽게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정영목 미술평론가

■ 박충흠은 누구…

박충흠 조각가는 1946년 황해도 해주 태생이다. 1965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1977년부터 1982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세자르(Cesar) 교실에서 수학했다. 학부에서 형상성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세자르의 지도로 환경조각 야외 설치 작업에 몰두하면서 작가로서 국제적인 안목과 경험을 쌓았다. 유수의 조각가로 성장하기 위한 이러한 교육 과정은 구상과 추상,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양식 모두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유학 후 파리에서 돌아온 박충흠은 동덕여대와 이화여대 조소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나, 작품에 매진하고자 일찍이 교수직을 사임하고 현재 제주도에서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음에도 작가로서의 묵직한 비중 덕에 대한민국 주요 미술전 운영 및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김세중조각상(2003)을 수상했으며, 선화랑·현대화랑·환기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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