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일어선 남자… 소설 ‘봄봄’ 속 마을을 다시 일으키다[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18) 춘천서 26년째 극단 ‘도모’ 운영… 공연·축제 전문가 황운기 이사장
청소년기 방황 끝 연극 만나
일본 유학 가서 관련 공부 뒤
‘좋은세상 도모’ 뜻 극단 창단
김유정의 소설 무대에 올리고
시민 대상 연극교실 등 운영
‘지역 예술인재 양성소’ 역할
“뉴욕·런던에 뒤지지않을 자신”
해외시장 속속 진출해 수상도

춘천 = 이성현 기자
‘문화와 예술이 지역소멸을 막을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이런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찾아간 곳은 한국 근대 리얼리즘의 선구자인 소설가 김유정이 나고 자란 강원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이었다.
김유정의 작품인 ‘봄봄’ ‘동백꽃’ ‘만무방’ 등 소설 12편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실제 무대가 바로 이 실레마을이다. 금병산 자락이 감싸고 있는 조용한 이 마을 한쪽에는 김유정의 소설 작품을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리며 연극과 문화기획, 교육, 사회공헌활동 등을 통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사)문화프로덕션 도모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극단 운영과 연출, 문화행사 감독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황운기(52) 도모 이사장을 만나러 간 날은 잿빛 구름 사이로 이따금 비치는 햇살이 반갑던 지난 2월 초의 오후였다.
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모습으로 나타난 황 이사장의 첫인상은 예술가와 극단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리더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화 도중 사무를 처리하는 모습은 노련한 문화예술단체 경영자였고 연극을 얘기할 때 무심히 드러나는 열정은 천생 무대가 체질인 사람이었다. 비유하자면 예술과 경영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줄을 타는 광대 같다고나 할까.
◇지역 문화·예술 플랫폼= ‘좋은 세상을 도모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도모는 황 이사장을 중심으로 지난 2000년에 창단된 전문예술단체다. 창작극 위주의 제작·공연 활동으로 수도권 대도시에 비해 공연을 접할 기회가 적은 춘천과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다채로운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자체 12개 창작작품을 고정 레퍼토리 형태로 구성해 연중 100일 가까이 연극공연을 한다. 여기에 기존 유명 작품도 저작권을 사서 2∼3개 정도 무대에 올린다. 지역주민은 물론, 공연을 보기 위해 수도권에서 찾아오는 관객도 많을 정도로 연극 애호가라면 주목하는 극단이다. 특히 2024년 열린 ‘제42회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춘천 청평사 상사뱀과 공주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 ‘인과 연’으로 금상과 연기상, 무대예술상 등 3관왕을 차지하며 작품성과 예술성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황 이사장은 “지역을 기반으로 시대의 가치를 담은 문화예술 콘텐츠를 통해 세상을 따뜻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도모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평소 취약계층을 위한 무료 공연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 교육을 진행하며 지속 가능한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 구축을 꿈꾸고 있다. 황 이사장은 “도모는 예술콘텐츠의 창작, 유통, 지역사회 연계라는 3가지 축을 중심으로 결과물을 지역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도모는 2015년부터 매년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한 연극교실 ‘나도 배우다’ 운영을 통해 춘천지역 연극의 저변확대 등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사회 활성화를 지원하고 있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연극교육 및 공연제작 프로그램으로 현재까지 총 3개의 아마추어 지역극단 창단이 이뤄졌고 이를 통해 ‘나도 배우다’ 출신 시민배우들이 연극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런 활동과 노력으로 도모는 2010년 강원도 1호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았고 2015년에는 사회적경제 선도기업으로 지정됐다.

◇문화예술로 사회·경제적 가치 실현= 사회적경제 선도기업은 취약계층 고용·사회서비스 제공 등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활동’을 함께 추구하며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을 말한다.
실제로 도모에서 경험을 쌓은 직원들이 독립해 문화단체를 설립하고 이끌며 춘천을 문화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소극장을 운영하며 공연을 하는 문화예술 사회적협동조합 ‘무하’와 춘천을 대표하는 축제인 막국수닭갈비축제를 지난해 운영한 문화예술 협동조합 ‘판’ 대표 역시 도모 출신이다. 황 이사장은 “춘천에서 활동하는 문화부문 사회적기업 2곳 중 1곳은 도모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6년간 도모를 거친 직원이 100여 명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모가 지역 문화예술계 인재를 양성하는 사관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없던 청소년 시절, 빛이 된 연극= 황 이사장은 연극 연출가로서뿐만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전국 유명 축제와 행사 연출 및 감독을 맡으며 공연예술계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로 통한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파워풀대구페스티벌 총감독을 맡았고 올해는 제23회 광주 추억의 충장축제 총감독으로 위촉됐다.
앞서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 기념행사 퍼레이드를 연출했고 2017∼2018년에는 평창문화올림픽 제작 감독, 2016∼2020년에는 제주 해비치아트페스티벌 총괄감독을 역임하는 등 춘천을 넘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공로로 2018년 대통령표창을 비롯해 2013년에는 예술단체우수경영 성과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는 등 화려한 수상 실적도 보유했다.
이제는 예술단체 경영자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축제 전문가로 손꼽히지만, 그의 이력은 시련을 딛고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스스로 일군 성공 신화로 불릴 만하다. 황 이사장은 1974년 강원 홍천에서 태어난 후 전북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등학생 때 강원 화천으로 전학을 왔다. 1989년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급성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같은 해 말에 심장마비로 잃었는데 그때 작은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하던 곳이 화천이었다. 당시 처음으로 교회에서 접한 연극에 매료됐다. 부모님 없이 남겨진 2명의 동생과 함께 불안한 미래로 방황하던 시기, 그에게 찾아온 연극은 선물과 같았다.
황 이사장은 1993년 고교 졸업 후 바로 춘천의 극단 ‘굴레’에 입단해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방송통신대를 다니며 학업과 극단 생활을 병행하던 그는 199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현지 극단의 운영 시스템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후 춘천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2000년 지금의 도모를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수입이 없다 보니 춘천의 각종 공연 포스터 부착 업무를 받아와 작업을 같이하며 버텼다. 그는 “스스로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과연 이 일을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역 문화자산 기반 세계 진출= 관객과 자본 등 문화 인프라가 척박한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극단을 26년째 지속해서 운영한다는 것은 ‘페달을 멈추면 쓰러지는 외발자전거’를 타는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주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춘천에서 연극을 하더라도 대학로나 뉴욕, 런던보다 뒤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한국의 대학로는 어차피 시장이 좁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춘천에 있더라도 전 세계에 있는 사람이 내 작품을 보고 싶으면 찾아오겠지라는….”
그래서 도모의 주 타깃은 해외시장이다.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도모가 보유한 창작극 지식재산권(IP)과 함께 20년 이상 해외무대에 작품을 올린 경험과 그 과정에서 구축한 네트워크가 있다. 황 이사장은 2005년 일본 마쓰야마 ‘전 일본 연극 페스티벌’ 공식 초청공연을 시작으로 꾸준히 해외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2007년에는 일본 야쿠모 국제연극제에서 ‘악몽’으로 최우수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등 3개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나라를 빼앗겼던 1940년대 초 쓴 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출생·고령화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역에도 과연 문화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지역의 문화자산을 뿌리로 전국과 세계를 상대로 문화적 역량을 발휘하는 도모의 ‘더 좋은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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